불굴의 도전으로 15세기를 써내려간 이베리아
❐ 선사시대 이베리아반도
이베리아(Iberia)반도에서 확인된 최초의 종족은 BC 20,000년대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 발견된 바스크(Basque)족이다. 에스파냐 북부 피레네 산맥의 바스크 지역은 인종, 언어가 에스파냐와는 다르다. 지금도 바스크 지방 인구의 ¼은 스페인어가 아닌 바스크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이베리아 역사의 선조는 기원전 11세기 안달루시아 지역에 왕국을 건설한 타르테소스(Tartessos)족과 BC 9세기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와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 중간쯤에 정착한 이베로(Ibero)족 그리고 BC 7세기경 유럽중부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남하한 켈트(Celta)족로 이뤄져있다.
❐ 카르타고와 로마의 침략
BC 3세기에는 북아프리카 튀니스만 북연안의 페니키아인에 의해 세워진 카르타고(Cartago)가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하지만 BC 2~3세기 로마는 이베리아반도 패권다툼 중 200백년에 걸친 3차례의 포에니 전쟁(Punic Wars)에서 한니발의 카르타고를 격파하며 지중해를 제패했다.
이로써 이베리아반도는 BC 2세기부터 약 600년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라틴어 사용과 가톨릭교를 수용하게 되었다. 라틴어는 고대 로마건국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탈리아 라틴족 언어로서 로마제국의 공용어였다. 영어의 근간을 이루는 라틴어는 천년이상 지나며 유럽 각국의 독자적 언어로 발전했다.
❐ 게르만족의 침략
고대 라틴어 권은 로마제국에 속했던 모든 지역들로, 동쪽으로는 이베리아반도와 서쪽으로 팔레스타인 지방이며, 북으로 브리타니아(영국)와 남으로는 북아프리카 지역이다. 5세기에는 게르만족인 반달족(Vandalos)과 서고트족(Visigodos)이 이베리아반도로 이동해 서고트 왕국(415년~711년)을 건설하였다.
❐ 이슬람교도의 지배
8세기에는 이슬람계열 무어(Moor)족의 침략으로 서고트 왕국이 멸망하자, 이베리아반도는 이슬람 문화와 함께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했으며 당시 이슬람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 당시 무슬림 침입자는 아라비아 아랍인이 아니고 북아프리카 사하라사막 지역의 베르베르인(Berbers; 모로코&알제리) 이었다.
무슬림들은 이베리아반도 서북쪽 갈리시아와 아스투리아스를 제외한 이베리아 전역을 점령하고 북부산맥을 넘어 세력을 확장코자 했다. 하지만 이슬람교도 축출을 위해 북부 산악지대에서 국토수복 운동(711년~1492년)이 시작돼 남쪽의 레온(León)까지 내려오며 많은 지역이 가톨릭교 세력 하에 들어갔다.
가톨릭교는 781년간 이어진 이슬람세력을 남부 안달루시아(Andalucía) 지방까지 몰아내고 회복된 땅을 중심으로 왕족형태의 독립적인 가톨릭국가로 각각 발전해갔다. 이때 형성된 왕국들은 [아스투리아스 왕국], [포르투갈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으로 각각의 지역에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1469년 카스티야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 '페르난도 국왕'이 결혼하며 연합왕국을 이루면서 최후까지 이슬람 지배에 있던 [그라나다 왕국]을 1492년 함락시켰다. 12세기 독립국형태를 이루고 있던 [포르투갈 왕국]은 1580년부터 에스파냐 속령이 되었으나, 1640년 '주앙 4세'가 왕위를 계승해 독립을 회복했다.
15~16세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독립된 해양강국으로 자리매김을 하며 바닷길을 열었지만, 식민제국 통치로 내정(內政)이 소홀해지며 내란과 함께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를 거쳐 19세기 나폴레옹 침략을 받았고 스페인은 1812년 입헌군주제, 포르투갈은 1910년 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인문학여행 행선지를 정하며
오늘날 서유럽이 선진국이 된 배경에는 중세기 해양시대가 열리며 라틴아메리카 신대륙 발견과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 및 약탈이 큰 역할을 했었다. 그들이 목표를 이루기위해 대서양을 따라 온갖 역경을 딛고 인도양으로 진출했던 까닭과 목숨 걸고 강행했던 항해(航海) 역사의 탐방을 오랜 기간 준비해 왔다.
그 첫 번째로 [이베리아반도]를 찾아 힘찬 향해 탐험의 선구자였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出港地를 돌아보고, 에스파냐가 첫 발을 디딘 쿠바섬을 기점으로 그들에 의해 멸망했던 [중남미 라틴아메리카]의 아즈텍 유적과 마야문명 그리고 잉카제국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버킷리스트 목록에 올린 지 십 수년이 흘렀다.
또한 거칠고 모질었던 인도양으로 나가고자 했던 포르투갈 항해 길목인 '폭풍의 곶'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찾아보고 역사탐방의 종착지가 될 인도 캘리컷(現:코지코드) 항까지 돌아보는 인문학여행의 작은 보따리를 풀어가고자 한다.
신항로 개척은 유럽인들이 항해술을 발전시키며 아메리카 항로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통해 다양한 대륙을 발견한 시대였다. 13세기 말 이탈리아 마르코 폴로는 육로를 통해 원나라에 도착했고, 돌아오는 길에는 말레이시아반도에서 인도서안을 거쳐 페르시아 만안(灣岸)을 순항했다.
이후 15세기 초 대항해시대 시작을 이끈 인물은 포르투갈의 엔리케 왕자였다. 그는 이슬람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인도나 사하라사막 남쪽지역과 교역할 수 있는 항로(航路)를 개척하고자 조선소와 항해술 및 지도제작법을 가르치도록 하고 탐험가들을 후원해 아프리카 서부항로 개척을 추진했다.
엔리케(Henrique) 왕자는 1418년부터 시작해 사하라사막 남쪽지역을 잇는 항로를 개척하며 1441년에는 아프리카 서해안에 닿아 그곳 사람들을 포르투갈로 끌고 왔다. 그는 당시 서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온 최초의 흑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며 탐험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도 했다.
[엔리케]는 살아생전에 인도로 가는 바닷길을 찾지 못했지만, 포르투갈은 계속해 아프리카 서부항로를 개척하며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발견했다. 1492년(성종 在位) 콜럼버스가 에스파냐의 지원으로 신대륙을 발견하자, 포르투갈은 에스파냐 탐험지역의 소유권 분쟁을 일으켰다.
1500년 카브랄(Cabral)이 리스본을 떠나 브라질 연안을 발견하자 포르투갈은 브라질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1494년 에스파냐와 세력 확장범위를 체결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브라질이 바다 국경선(서경 43도 37분)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브라질을 포르투갈령으로 확정하였다.
당시 로마교황은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으로 480㎞ 떨어진 지점에 경계선을 긋고, 에스파냐는 아메리카 대륙 서쪽으로 진출하고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포함해 동쪽인 대서양을 통해 아시아 및 동인도 제도로 진출하게 됐다. 이로써 브라질은 남미에서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쓰는 나라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인 1497년 7월 리스본 벨렝(Belém)항을 출발한 바스코 다 가마는 디아스(Dias)와 동행하며 원정대를 꾸려 리스본을 떠난 지 316일 만인 1498년 5월 인도 캘리컷(코지코드)에 도착했다. 원정대는 향신료 등을 구입한 후 도착 3개월 만인 8월말에 서둘러 귀국길에 오르며 인도양 항로를 개척하였다.
당시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베니스 상인들이 동방과의 향료무역을 하며 폭리를 취했는데, 15세기 들어 대서양 맨 끝자락에 위치한 포르투갈은 그나마 향료를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인도로부터 오는 후추와 정향(丁香) 수요가 간절해지며 이를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항해 길의 모색이 포르투갈에서 먼저 일어났다.
1519년 8월 마젤란은 탐험대를 이끌고 에스파냐 세비야 항(港)을 출발해 산루카르(Sanlúcar) 항구로 이동한 뒤 최종점검을 마치고 9월 출범해 인도양 북서쪽으로 향하며 태평양을 횡단해 1521년(중종 在位) 3월 필리핀군도에 도달했다. 이것으로 아메리카 신대륙과 아시아 대륙은 별개 지역이란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