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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Nov 12. 2024

이베리아 탐방기(02)


대항해시대를 열어간 이베리아반도


❏ 포르투갈 영광과 퇴락의 항구도시 [포르투]


16세기 전후 300년을 세계사에서는 대항해(大航海)시대라고 부른다.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1520년 마젤란의 세계일주, 1642년 네덜란드 아벨 타스만의 뉴질랜드 발견(☞1653년 하멜 서귀포 표류), 1778년 영국 제임스 쿡의 호주 동쪽해안 시드니와 하와이 발견으로 이어진 신대륙 대발견의 시대였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수혜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었다. 해양대국으로 성장한  포르투갈을 기점으로 뒤를 이어 무적함대로 해상패권을 거머쥔 에스파냐는  해가지지 않는 제국시대를 열었다. 포르투갈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닿기 70년 전부터 일찌감치 바다로 눈을 돌려 북대서양아프리카 근해로 진출했지만 아깝게도 해양대국의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포르투를 출항하는 탐험대

하지만 발 빠른 의사결정과 과감한 추진력으로 콜럼버스마젤란 그리고 [마야제국]과 [아즈텍왕국]을 정복(1521년)한 코르테스와 [잉카제국]을 정복(1535년)한 피사로를 후원한 에스파냐에게 많은 식민영토와 경제적 부(富)가 집중되었다. 그럼에도 항해시대 첫 문을 과감히 열고 바다라는 신세계로 뛰쳐나간 나라가 포르투갈이었다.


그로인해 한 시절 세계 여러 대륙에 식민지 땅을 양분했던 해양강국 시대도 있었다. 포르투갈이란 국명은 이베리아반도의 해상무역 거점이었던 항구도시 포르투(Porto)에서 비롯되었다. [포르투]라는 지명은 이미 2,000년 전에 고대 로마인들이 항구(Portus)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인 [포르투]는 나라이름을 낳았다는 자부심과 함께 그 옛날 대항시대를 선도했다는 자부심이 깃들어 있다. 15세기 항해시대 초기에는 포르투갈의 선단이 포르투를 모항(母港)으로 출발하기도 했다. 대서양으로 흘러나가는 포르투의 도루(Douro)강 북부 하구(河口)는 포르투항의 출발점이다. 



15세기 초 대항해시대를 주도했던 포르투갈 엔리케(Henrique) 왕자의 후원을 받아 포르투(Porto) 항구를 출발한 탐험대는 1415년 북아프리카 지브롤터 해협의 남동쪽에 위치한 세우타(Ceuta; 현 스페인領)를 첫 식민지로 정복했다. 이어 마데이라(Madeira)제도 등 여러 작은 섬들을 식민지로 개척했지만 적극적 지원에 따른 별반 소득을 얻어내지 못했다. 


이들 섬 때문에 포르투갈은 육지면적은 크지 않아도 현재 해양면적은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있다.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해안]을 항해하며 금이나 흑인노예 등 다양한 물품을 거래하는 교역소를 설립했는데, 이는 리스본의 주요성당에 화려하게 남아있는 금장식의 근원과 연결돼 있다.


❏ 세계일주 첫 항해에 나선 항구도시 [세비야] 


스페인 서남부의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마드리드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다음 4번째로 큰 도시로 유서 깊은 역사와 다양한 문화가 중첩된 도시이다. 피가로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세빌리야의 이발사’는 스페인 발음으로 세비야(Sevilla)이다. 세비야에는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가는 과달키비르 강이 있다. 


[세비아]는 스페인에서 강을 통해 배로 항해할 있는 중요한 항구도시이다. 15세기 신대륙을 향한 콜럼버스의 첫 출범(出帆)은 팔로스(Palos)이었고, 마젤란의 출항지였던 산루카르(Sanlúcar) 항구과달키비르 강을 끼고 있는 세비야항과 함께 대항해의 출발지로서 한 시대가 전환되는 동력의 진원지였다. 



당시 [세비아]가 무역항으로 정착되면서 [팔로스 항구]는 그 옛날의 활기찬 모습이 사라졌다. 1492년 이슬람세력의 최후 보루였던 [그라나다]를 함락한 이사벨 여왕은 국호를 [에스파냐]로 정한 뒤 콜럼버스를 적극 지원하여 같은 해 8월 팔로스 항구를 떠난 탐험대는 일주 일만에 아프리카 북서쪽 카나리아 제도(諸島)에 도착했다.



그 해 10월 바하마 제도를 발견하고 이어 쿠바 과 히스파니올라(도미니카 공화국)에 도달했다. 이어 1504년까지 4차례 항해에서 중앙아메리카(온두라스,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해안을 탐사했다.  이후 1519년 마젤란의 첫 번째 세계일주가 시작되면서 세비야는 에스파냐 제국의 해상무역지로 자리매김 했다. 


세비야의 위성도시이자 외항(外港) 역할을 해온 산루카르(Sanlúcar de Barrameda)는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 과달키비르 강 끝자락에 위치한 역사적인 항구도시이다. 15~16세기 에스파냐 함대는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약탈한 금은보화를 가득 싣고 1년에 2~3번씩 산루카르 항구를 통해 세비야항에 입항했다. 



스페인 령(領)인 라틴아메리카와 왕실과의 독점교역이 이뤄진 [세비야]는 신대륙의 금은보화가 들어오면서 번영을 맞이했고 유럽각국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당시에는 세비야를 가로지르는 과달키비르 강의 수심이 깊고 유량(流量)도 많았으며 선박들도 작았기에 [세비야항]은 무역도시이자 신대륙 교역의 관문이 되었다. 



황금기를 누렸던 세비야는 17세기 들면서 과달키비르 강의 퇴적(堆積)으로 수위가 낮아지고 무역선의 크기가 커지면서 항구가 아닌 내륙도시에 가까워졌다. [세비야] 무역항 기능이 환경의 변화에 따라 사라지면서 지금은 바다와 직접 대면한 도시인 카디스(Cádiz)와 말라가(Málaga)가 새로운 항구로 부상하게 되었다. 


⟦항해별 연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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