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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주 Oct 13. 2015

조선왕과의 만남(15)

세조릉_02


제7대 세조 1417~1468 (52세) / 재위 1455.06 (39세)~1468.09 (52세) 13년 3개월



▐  광릉(光陵) 사적 제197호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100-1


세조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정적들을 제거해가면서 정치를 안정시켰다. 그 과정에서 신권을 축소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다 보니 정치는 문치(文治)보다는 패도(覇道)로 변모해 갔었다. 그 결과 유교 대신 불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펴나감으로서 불경간행 등의 공적을 남겼으나, 독단적인 정치행보에 따른 폐해도 적지 않았다.


더욱이 세조는 자신의 육친이던 단종금성대군 등을 죽이면서 자신을 왕으로 옹립했던 한명회신숙주 등을 효과적으로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혼인을 통해 더욱 깊게 연결됨으로서, 이들 공신들의 권세를 더욱 심화시켰다.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던 도중 북도(北道) 호족들의 불만과 민심을 선동한 이시애 난이 일어나자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세조는 재위 13년 동안 괄목할만한 많은 업적을 쌓음으로서 중앙집권적 [왕권강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시애 난

세조는 군사 분야에 대해 깊은 관심을 지녀 병법(兵法)에 관한 서적을 기획하고 보급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 바로 신숙주가 병법관련 서적의 주석(註釋)과 보급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관제개편과 기강확립을 통해 [중앙집권제]를 확립하였으며 국방강화를 위해 호패제를 통한 전국의 방위체제를 편성하고 중앙군을 5위제로 개편했다.


북방개척에도 힘써 신숙주로 하여금  두만강건너 야인을 소탕해 북정(北征)을 단행하고, 남이장군을 통한 서정(西征)으로 서북면 영토의 안정을 꾀하였다. 경제정책에서는 과전법(科田法)을 폐하고 직전법(職田法)을 실시해 현직관리에게만 토지를 지급함으로서 국가수입을 늘렸다.


illustrator / 유환영

또한 궁중에 잠실을 두어 왕비에게 양잠을 권장하고 농서를 간행해 농업을 장려하였다. 국조보감 등 사서(史書)를 편찬하도록 하고 경제육전 등의 법전과 경국대전을 편찬하게 함으로서 성종 때 완성을 보게 한 것은 특기할 만한 치적이다.


또한 불교를 숭상해 법화경, 석보상절 등 [한글번역]에 직접 참여하는 한편 원각사(圓覺寺)를 창건하기도 했다. 세조는 생전에 그의 업보 때문인지 많은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세조 12년 가을 어느 날, 세조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꿈에 단종 생모인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illustrator / 이보택

그녀는 세조를 향해 자신의 아들을 내쫓은 것을 꾸짖으며 눈을 부릅뜨고 목을 조르기 시작하였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세조는 한참 만에 겨우 그녀의 손을 뿌리칠 수 있었는데, 이때에 현덕왕후는 그의 몸에 침을 뱉고 사라졌다.


그리고 세조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잠시 후 동궁 내시가 달려와서 황급히 아룀에, 의경세자가 잠을 자다 가위에 눌려 매우 위중하다는 것이었다. 세조가 급히 동궁에 행차하여보니 이미 세자는 목숨이 끊어져 있었다.



세조는 맏아들에 죽음이 형수인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이라고 여기고, 관리를 보내 그녀의 능을 파헤쳐 서인(庶人)의 무덤으로 만들라고 하명(下命)하였다. 세조의 명을 받은 신하가 왕후의 능을 파고 관을 꺼내려 했지만 웬일인지 관이 꿈쩍도 하지 않자,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더니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


능에서 꺼내진 관은 바닷가 십리 밖으로 옮겨져 매장하는 엽기적인 행각을 저질렀다 전한다. 이후 세조는 꿈속에서 현덕왕후가 내뱉은 침을 맞은 곳에서 흉측한 종기(腫氣)가 돋기 시작했다.



종기는 차츰 온몸으로 퍼지더니 고름이 나면서 점점 악화되어, 전국 방방곡곡의 명의를 불러 모아 치료를 받아보았으나 신통치 않았고 어떤 약을 써 봐도 별 효험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유명한 산과 절을 찾아다니며 불공을 드려 보았지만 도무지 낫질 않았다.


손톱에 살점이 묻혀나도록 긁어대던 세조의 피부병이 문둥병 이였다는 기록도 보이고 있다. 세조가 치료를 위해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상원사에서 월정사에 이르는 계곡에 이르러 시종을 물리치고 그는 진물이 질질 흐르는 알몸을 맑은 계곡물에 적셨다.



한여름 중천(中天) 해가 벌거벗은 왕을 내려 보고 있을 때, 지나가던 한 동자승에게 등을 밀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자에게 어디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 말하지 말라하니, 동자 역시 상원사 계곡에서 문수동자(文殊童子)가 등을 밀어주었다고 말하지 말라면서 사라졌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펴보니 동자승은 간곳없고 어느새 자신의 몸에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게 됐다.  문수보살의 보살핌으로 불치의 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해 화공을 불러 자신이 보았던 동자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여 [상원사] 본당에 목각 문수동자상이 모셔져있다.

      


세조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을 옮겨본다. 성종 조의 어느 날, 세조가 그의 장남 의경세자 후궁인 권귀인윤소훈을 범하려고 했다는 추문이 돌았는데, 이때 춘추관 사관(史官) 김일손은 귀인 권씨의 조카이자 양자인 허반에게서 들은 것을 사초에 기록했다.


1498년(연산군 4) 7월 연산군은 [성종실록] 편찬을 위해 김일손의 사초 기사(記史)를 읽고 직접 국문하였다.

"권귀인은 본래 의경세자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는 구절과, " 세조는 소훈(昭訓) 윤씨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리었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는 사초 내용을 문제 삼았다.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궁정의 숨기고 싶은 세조의 비리는 왕실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연산군무오사화에 단초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세조실록 8년(1462) 12월에는 "내가 본래 색(色)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술을 마시고 싶으면 너(예종)와 여러 장상(將相)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절대 궁첩과 더불어 술을 마시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세조는 많은 연회석에서도 술자리 이상의 무절제를 본인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고, 세자를 향한 절제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한다. 실제로 세조는 1명의 후궁만 두었으며 대부분 술자리는 조강지처 정희왕후가 함께 했으며 국가와 왕실의 대소행사에도 왕후를 동반했던 가정적인 군주였다 하는데, 이렇듯 세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전히 팽팽하다.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죽여 버렸던 냉혹한 야심가이자 실추된 왕권을 강화해 국가기반을 튼튼히 한 부국강병의 군주가 세조이니, 평가자들이 그들 나름대로 본 세조의 모습에 더 큰 무게를 둘 뿐이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세조는 죽음을 예감하고 재위 14년 차남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왕이 죽으면 왕가의 사당인 종묘에 신주를 모신다. 신주가 종묘에 들어갈 때 그 공적을 기려 이름을 짓는데 그것이 묘호이다. 당초 세조의 묘호는 신종(神宗) 예종(睿宗) 성종(聖宗)이 거론됐으나 예종이 고집해 세조(世祖)로 정하였다. 묘호의 첫 자는 임금의 업적을 두번째는 종법상의 지위를 나타낸다.



이때 조(祖)와 종(宗)의 구별은 조공종덕(祖功宗德)을 취함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는 계승한 왕이라는 세(世)자와 나라를 세운 왕이라는 조(祖)자를 모두 가진 왕이 되었다. 세조라는 묘호는 그의 평범치 않았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만년에는 단종 왕위찬탈에 대한 인간적인 고뇌에 싸여 번민하다가 불교의 가르침에 의지하며 52세 수강궁(壽康宮: 창경궁 옛터)에서 승하하였다.   

  

"영광과 비난이 함께했던 영욕의 생애가 함께 묻힌 전하의 빛나는 무덤 광릉을 마주하며, 절대군주로서 홀로 외롭게 고뇌해야 했던 질곡의 세월을 역사를 통해 다시금 옵나이다."




제7대 세조비 정희왕후 1418~1483 (66세)


정희왕후 윤씨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여식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세조의 오른쪽 언덕에 누워있는 그녀는 여장부(女丈夫) 기질을 가진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의 역사적 인물 중에 단연 최고의 여성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만큼 그녀는 대단한 용맹가이고 지략가였다.



계유정란 당시 용병거사가 누설되어 손석손 등의 만류가 있었으나 대군이 중문에 이르자, 정희왕후수양에게 갑옷을 들어 입혀서 용병을 결행하게 하였다. 그녀는 1428년(세종 10) 수양대군 가례를 올리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평생 세조의 사랑을 받으며 정치적 동반자의 삶을 살았다. 슬하에 의경세자, 예종, 의숙공주 등 2남 1녀를 두었다. 그녀의 맏아들 의경세자가 20세에 요절함에 따라  둘째 아들 예종이 19세에 즉위하였다.


illustrator / 이철원

하지만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바로 한명회와 결탁해 의경세자의 둘째아들 자을산군(者乙山君)을 당일에 왕위에 올렸다. 그녀는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로써 13세의 성종을 대신하여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했던 여인이었다.


이는 조종조(祖宗朝)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예종의 어린 아들 제안대군이 있고 또 성종의 형 월산대군이 있었는데도 당일로 즉위하게 한 것은 정희왕후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수렴청정은 왕과 신하들이 토론한 내용을 왕후가 적절히 조언해주는 방식이었다.



이때 그녀의 훌륭한 정치적 감각과 과감한 결정으로 조정은 평화롭게 안정기를 구가하였다 한다. 그녀는 불교를 신봉하면서도 중도(中道)와 정도(正道)의 정치를 이끌며 당대 세도가였던 한명회신숙주 등이 부복(俯伏)할 정도로 뚜렷한 정치철학을 갖고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했다.


남편과 아들 그리고 손자의 즉위에 직접 힘을 쏟아 부었던 정희왕후는 어느 날 조용히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감으로서 성종 14년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평온히 이승을 하직하였다.  


동원이강릉으로 조영된 정희왕후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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