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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엠디 Jun 04. 2024

신혼,출장간 남편 전화를 팀장님이 대신 받았다

결혼 일년차,퇴사 2주 뒤 나에게 닥쳤던 시련. 남편의 두부외상과 뇌출혈

9년 차까지 일해왔던 대기업을 퇴사한 지 한 달 하고도 어느덧 반이 지났습니다.

회사생활에 대한 소회와 퇴사 뒤의 일상에 대한 기록을 남기겠다고

브런치 구독자님들께 말씀드렸던 다부진 포부가 무색했네요.

한 달 반 만에 브런치에 돌아왔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상황이 마무리된지라 

지난 한 달 반의 이야기를 담담히 남겨보고자 합니다.

백사장 위를 맨발로 걸어가듯 밑의 무수한 모래알갱이가 거슬리는 인생, 그게 행복이었다는 비로소 깨달았을 불행이라는 파도가 이미 덮친 뒤였습니다.


저의 남편은 해외 출장이 잦은 직업입니다. 제가 9년간 잘 다니던 대기업을 퇴사한 이유도, 남편을 따라 2년간 해외발령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4월은 저에게 정말 몸과 마음이 지치고 정신없는 달이었습니다.


정든 동료와 회사와의 이별, 경력단절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그리고 낯선 미국 생활을 준비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까지. 그 와중에 남편은 한국에서 비행으로 20시간 이상 떨어진 지구 반대편으로 출장을 가게 됩니다. 원래도 출장이 잦은 직업이었지만 이번엔 이상하게 내키질 않았습니다. 남편이 출장을 가고 나서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날은 편하게 자려고 부모님 뵈러 친정을 갔던 날이 었어요.결혼하고 갓 일 년이 지난 시점의 출장이었지요.  남편이 일을 마무리하고 저녁 먹으러 식당에 갔다고 직원 분들과 인증샷을 찍어서 보내주었는데, 그게 한국에서는 오전 11시쯤 되었을 거예요. 


술을 잘 못하는 남편인지라 와인이라도 한 잔 먹었냐고 물어보는데, 답이 없었습니다.

(당시 술은 거의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보이스톡을 받지 않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두 번째 건 전화에서 남편이 아닌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바로 만나 뵌 적도 있던 남편의 팀장님이었습니다. 심장이 쿵, 이라는 표현도 모자라 심장을 누군가가 쥐어짜서 비트는 느낌이었습니다. 


"제수씨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씨(남편)가 회장실에 갔다 오면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어요.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박았는데 지금 중환자실입니다. 저희가 여기 지키고 있으니 너무 놀라지 마시고요."




카톡첨부 (연소는 이름이 아니라 제 애칭입니다) 




원인불명으로 인한 실신 (발견당시 심박수가 20) , 두부외상, 두부외상으로 인한 두개골 골절과 좌측 측두엽 경막 외 혈종 외 전두엽과 실질 내 촛점 등. 

그리고 그날부터 지옥이 시작됐습니다. 감사히도 현지에 같이 출장 가신 팀장님께서 곁을 지켜주셨지만, 중환자실인지라 아주 잠깐 면회만 가능할 뿐이었어요. 면회가 끝나면 팀장님께서 보이스톡을 주셨습니다. 저는 하루종일 그 시간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 같더라고요. 그게 한국 시간으로 새벽인지라, 일주일 간 팀장님의 전화를 기다리느라 먹지도 자지도 못했습니다. 뇌와 심장 관련 환우들의 카페에도 당장 가입했습니다. 


 다양한 예방접종 등을 하며 저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출국 준비를 했습니다. 당장이라도 응급상황이 오면 어떡하지, 불안감에 피가 마르더라고요. 카페에서 다른 환우 글들을 찾아볼 때마다 만약에,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불안감은 커져만 갔습니다. 자꾸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게 되더라고요. 뇌는 한 번 다치면 그 부위 재생이 안된다고? 뇌는 미지의 영역이라고? 넘어졌는데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 거 아냐, 인간의 몸은 왜 이렇게 약한 거야, 아픈 사람은 세상에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별의별 원망과 후회로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습니다. 친정 부모님 앞에서는 담담한 척하고 싶지만, 화장실에만 들어가면 눈이 퉁퉁 부어서 벌게져서 나오는 딸내미의 모습을 부모님도 모르실 리가 없었겠지요. 


그리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행복하다고 너무 떠들고 다녔나. 인생을 겸손할 모르고 살아왔나.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과신과 끝없이 높은 곳을 향한 욕심으로 만족해서 벌 받았나보다..  당장 어제만 해도 높게 솟아오른 고층의 고가 아파트들을 보고 부러워하진 않았나, 별의별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무 욕심부리지 않을 테니, 우리 남편 살아서 오게만 해주세요.라고요.


시부모님께는 너무 놀라실까 봐 차마 말도 못 하고, 시누에게만 상황을 공유하고 둘이 의지하며 지냈습니다. 제가 하필 친정에 갔던 날이라 친정부모님은 당일에 알게 되셔서 역시 많이 괴로워하셨어요. 여기저기 빌지 않아본 곳이 없었습니다. 그 어떤 종교든 신이든 조상이든 누구의 도움이라도 간절했습니다. 

남편은 거의 3-4일간 잠에 취해 있었고 많이 괴로웠다고 합니다.

남편이 의식을 잃은 기간은 3일. (남편은 현재도 사고 당일부터 사고 후  3일까지의 기억이 없습니다.)


일어나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소망도 점점 작아지더라고요.


저를 기억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마비가 된다 한들 괜찮아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간병하고 같이 재활해서 이겨내면 되니까요. 살아서만 오게 해 주세요. 많이 기도했습니다. 


5일 뒤 남편은 기적처럼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기게 됩니다. 비록 스치면 두통에 괴로워하고, 왼쪽 시야각이 눌렸으며 눈을 감으면 옥수수가 떨어지고 검은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환상통에 시달렸지만요. 그리고 남편이 의식을 찾았을 때 시부모님께도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양가가 쑥대밭이었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남편은 치료를 위해 현지에서 일주일 정도 머문 뒤, 가장 우려했던 장거리 비행기까지 무사히 타고 귀국 하게 됩니다.(뇌출혈은 남아있었지만, 나이가 젊어 회복속도가 빠르고 환자 본인 의지가 강해 의사소견 하에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게 됩니다.)



 처음 받아보고 오열했던 남편 사진.


한국 와서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하루가 다르게 남편은 쌩쌩해져서 회복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한국에 귀국했을 때에는 저와 하루에 한 마디 나누는 것도 힘들어할 정도로 괴로워했는데, 지금은 거의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다만 이상하게도 뇌에서 반복적으로 당시 먹었던 음식 (해산물 등)이 반복재생되면서, 해산물을 먹을 수도 술을 마실 수도 없는 몸이 되었지만요. 


처음 MRI를 재생하고 경악했을 정도로, 왼쪽 뇌를 주먹만 한 핏덩이가 (제가 보기엔 그렇게 커 보였습니다) 누르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나이가 젊고 운동을 많이 했어서일까요, 하늘이 도우셔서 일까요. 의사 선생님들이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회복 중입니다.  

병원 갔다올때마다 CT 와 MRI를 까먹지 않게 제가 손그림으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최종 6군데 뇌출혈, 그리고 3군데 두개골 골절이었네요. 




 10년간 평소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고강도의 유산소 (8KM 러닝) 및 근력운동을 하는 남편인지라, 그 누구보다 건강관리를 잘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보니 본인도 많이 놀랐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한국에 입국하고 나서 처음 한 달간은 병원 갈 컨디션이 아니라며 병원을 거부해 제 속을 바글바글 끓이기도 했으니까요. 기껏 다 예약해놨는데 왜 병원을 안 가겠다고 고집인지, 심지어 혈압이 160인데도 절대 고혈압 약은 지금 시작하지 않겠다고 해서, 이게 무슨 똥고집이냐며 정말 결혼생활에 큰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남편은 모를 겁니다. 어떤 심정으로 그가 살아돌아오길 제가 간절히 바랐었는지요. 


우여곡절 끝에 방문한 흉부외과와 신경외과에서 이런저런 검사들을 했지만, 실신에 대한 뚜렷한 원인은 찾지 못했습니다. 심장 초음파 결과를 보니 심장도 멀쩡하더라고요. 다만 남편이 우기던 고혈압 약만큼은 먹기로 했습니다.



한번 넘어진 걸로 이렇게 고장이 나다니, 인간의 몸은 얼마나 미약하고 인생이라는 것도 한 순간인 것일까.

부질없음과 공허함도 많이 느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늘 더 많이 벌고 싶고 많이 쓰고 싶고 위만 바라보며 살진 않았나 정말 반성도 후회도 많이 되더라고요. 저에게는 우리 가정뿐 아니라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정말 무서워지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이처럼 유한한 데, 앞으로 나의 가족, 특히 부모님과 이별하는 순간이 오면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그런 무서움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하루하루의 일상을  더욱더 밀도 있게, 가치 있고 소중하게 보내고자 합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특히 감사하고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십니다. 남편이 출장지에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던 그때, 순천향대학병원에서 혹시 모를 출국을 대비해서 황열병 주사를 맞은 뒤 택시를 탔습니다. 트로트 음악을 크게 틀어두신 유쾌하고도 사교성 좋은 기사님이 저에게 인사를 건네셨는데, 안녕하시냐는 그 일상적인 말 한마디에 갑자기 일주일 간 꽉 막혔던 숨을 토해내기라도 한 듯 정말 짐승처럼 꺽꺽거리면서 울었습니다. 안녕하지 못합니다..라고요. 집에서는 부모님께서 걱정하실까 봐 크게 울어보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토해내듯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음악까지 끄시고 정말 아버지처럼 괜찮을 거라고 저를 위로해 주신 택시 기사님께 정말 감사했습니다.


***

이 글을 우연히라도 읽어주신 모든 독자님들, 그리고 독자님들의 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그 누구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며 글을 끝맺습니다. 앞으로는 몇 달 뒤 펼쳐질 미국 생활을 준비하는 이야기들을 써보며 좀 더 자주 브런치를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jangbanini/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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