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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모메 Aug 16. 2022

명랑한 은둔자

달밤에 번데기와 함께 춤을

 

 일주일 내내 무기력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졌다. 제일 두려워하는 불청객이 또다시 찾아온 것이다. 한동안 글을 쓰면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 무기력이라는 손님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내 안에서 강력한 무기를 휘두른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되었다. 밖으로 나가는 문이 철문처럼 차갑고 두껍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보통 샤워를 하고 이불 정리를 하면 좀 나아지는데, 이번에는 초강력 접착제로 단단히 붙인 것처럼 딱딱하고 꺼끌꺼끌한 게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덕분에 일주일 내내 ‘글을 써야지’라는 생각으로 괴롭기만 하다, 글을 올리려고 마음먹은 수요일 자정이 몇 시간 남지 않은 시점에서야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생각의 갈래를 틀어보려고 해도, 결국 뇌의 알고리즘이 자책이라는 선택지를 추천해 준다. 자책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나는 식빵이고 침대는 설탕을 푼 우유 같다. 내 몸은 우유에 푹 적셔진 식빵이다. 벗어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시간여행 물의 주인공처럼 침대로 타임리프를 한다. 그리고 나선 어떤 박사의 실험실 속, 방부제가 가득 담긴 유리병에 들어가 있는 뇌가 된다. 그렇게 꼼짝하지 않고 누워서 끊임없이 생각만 한다. 알바몬과 사람인, 그리고 연기 구인·구직 사이트를 번갈아 들락날락하며 이렇게 일자리가 많은데 왜 내 자리는 없을까 하는 학습된 무기력을 느끼다 다시 잠이 든다. 엄마와 애인에게 내가 종일 자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어난다. 깨어있고 바쁘다고 그들을 안심시킨 뒤 또 꿈의 세계로 도피한다. 도망친 곳에 천국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꿈은 로또 같다. 때때로 기분 좋은 꿈을 꾸지만, 오늘의 룰렛은 꽝이다. 헐떡거리는 호흡으로 간신히 일어나서 거울을 보니 퉁퉁 부은 얼굴, 빵빵해진 몸과 무거운 머리가 느껴진다. 삶에 대한 열정으로 반짝거리는 눈이 장점이라고 느끼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텅 비고 흰 물감을 푼 것처럼 탁하게 느껴진다. 이러다 눈이 그저 그 자리만 지키게 될까 봐 두렵다. 모든 것에는 체력이 기본이라는 말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이런 내 마음을 어떻게 아는지 유튜브에 들어가면 기막히게 추천이 뜬다. ‘20대 때 이렇게 살면 인생 망합니다’ 부류의 영상들. 내가 완벽하게 잘못 가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성인 ADHD에 대한 동영상을 보니 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병원을 가보아야 하나. 자책하지 않기 위해,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었던 환경을 원망해 본다.

 애인이 번데기 이야기를 해줬다. 애벌레에서 번데기가 될 때, 애벌레는 번데기 속에서 완전히 분해된다고 했다. 그리고 새로이 만들어진다고. 나는 나비가 되기 위해 새롭게 분해되고 있는 과정일 뿐이다. 그러니 일 년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나아진 것에 집중해 보라고 했다. 작년 이맘때 심리 상담을 받으며 적었던 메모장을 읽어보았다. 그간 나이만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영역을 지키고 집중하는 법 또한 많이 늘었다는 것을 알았다. 힘이 나서 베란다에 차린 스테인드글라스 연습실의 첫 작품으로 번데기를 만들었다. 어떤 번데기를 만들까 고민하다, 내가 좋아하는 달과 합쳐 ‘달 데기’를 만들었다. 점점 만월을 향해 차오르는 중인 달과 나비가 되어가는 번데기 사이에 묘한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하며. 첫 작품으로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시간도 잘 가고.

 살려고 꿈틀거리는 것들에 약해진다. 커튼에 몸이 걸려도 살려고 발버둥 치는 벌, 낚싯바늘에 찔려도 입을 꾹 다물고 미친 듯이 꿈틀거리는 물고기, 먹이를 먹으려고 몰려든 개미에게도. 가끔은 멈춰있는 나보다 부지런히 뛰는 심장에 존경심을 느낀다. 심장이 이렇게 열심히 뛰어주는데. 이 작은 장기도 제 할 일 하려고 쉬지 않고 쿵쾅거리는데. 장기만큼 열심히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모두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살려고 노력한다. 희망을 잃지 말자. 삶의 꿈틀거림을 기억하자. 그 힘을 믿고 나를 믿고 지금의 시간을 나를 사랑하는 시간으로 기억하자. 그러고 보니 스스로 응원하는 이런 의식의 흐름은 작년까지만 해도 참 낯설었는데, 무기력의 시간 동안 얻은 게 또 있구나. 어쩌면 나는 그냥 나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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