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쯤은 있어야 할 공간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쉰에 시작한 회사 생활이 가끔은 벅차게 느껴진다. 굳이 스트레스라는 말로 묶고 싶지는 않다. 예전에는 곧잘 마시던 에스프레소가 어느 순간 부담스러워졌다. 커피 한 잔이 버겁다는 감각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쳐 있다는 신호처럼 다가온다. 말 그대로 속이 상한 상태다.
연말이 오기 전부터 마음은 먼저 분주해진다. 12월, 이맘때가 되면 실적 압박을 비롯해 여러 사정이 겹친다. 해마다 이 시기에는 작은 노트를 꺼내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기록은 점점 짧아지고, 목표가 때로는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지를 넘기며 다시 기준을 세워 본다. 크게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내려놓지는 않는 쪽으로 말이다.
연말이 다가오면 우리는 새해를 위해 무언가를 계획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나이를 먼저 꺼낸다. 이제는 늦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지금 시작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는 판단도 곁들여진다. ‘늦었다’는 말은 더 해보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고, 더 애쓰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되곤 한다.
예전에 우연히 읽은 기사 하나가 오래 남아 있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한 노인의 이야기다. 인도 출신의 파우자 싱이다. 그는 평생 운동선수로 살지 않았다. 인생의 큰 상실을 겪은 뒤, 일흔을 넘긴 나이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마라톤 도전은 여든아홉 살 이후의 일이었다.
기록은 느렸다. 출발선에서는 늘 가장 뒤였다. 그럼에도 그는 아흔을 넘긴 나이까지 여러 차례 풀코스를 완주했다. 사람들은 그를 세계 최고령 마라토너로 불렀지만, 그는 성공을 말하지 않았다. 달릴 수 있는 날에는 달렸고, 쉬어야 할 날에는 쉬었다. 결과보다 지속이 기준이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하려 할 때 마지막 성과부터 계산한다. 끝까지 해낼 수 있는지,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남는지, 남들 앞에 내놓을 만한지부터 따진다. 그 과정에서 바쁘다는 이유, 비용이 든다는 이유, 때가 아니라는 이유가 앞선다. 그렇게 시작은 미뤄진다.
시작이 어렵다면 방향을 바꿔 볼 수 있다. 우선 나만의 쉴 수 있는 공간을 찾는 일이다. 도서관이어도 좋고, 수목원이어도 좋다. 왁자지껄한 맥주집이나 조용한 영화관도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에 머무는 동안 호흡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는지 여부다.
자기만의 케렌시아를 찾아보자. 케렌시아는 원래 스페인 투우장에서 나온 말이다. 투우사와 맞서 싸우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소가 결전을 앞두고 잠시 머물며 숨을 고르는 자리,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지점을 가리킨다. 도망치는 곳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버티기 위해 힘을 회복하는 공간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케렌시아도 다르지 않다. 반드시 생산적인 장소일 필요는 없다. 목표와 성과가 없어도 된다. 잠시 내려놓고 회복할 수 있는 자리면 충분하다. 그렇게 숨을 고르는 시간이 쌓이면, 다시 움직일 여지가 생긴다.
2026년이 다가온다.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느리더라도 괜찮다. 핑계부터 찾는 대신, 나를 쉬게 하는 공간 하나쯤은 마련해 두는 편이 낫다. 그곳에서 다시 방향을 잡아도 늦지 않다. 우리의 삶이 단단해지되 경직되지 않고, 차가우면서도 끝내 부드러움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