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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수연 Feb 19. 2019

덕질을 리스펙...(알바몬 쌈디 말투 ver.)

아이돌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을 하다 보면, 팬들로부터 이런저런 선물을 받게 된다. 먹기 황송할 만큼 예쁘게 각잡힌 간식부터 케익, 액자, 티셔츠, 급기야 화장품까지도 받아 봤다. 디제이의 팬들이 보내기도 하고, 초대석 코너에 섭외된 연예인의 팬들이 보내기도 한다. ‘잘 부탁한다’는 손편지는 기본. 얼마 전까진 ‘조공’이라고 불렸는데, 어감이 안 좋아서인지 요즘엔 보통 ‘서포트’라고 한다.
여기까지 읽고,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도 분명 있을 것이다.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왜 저런 쓸데없는 데 쓰나, 좋아하는 연예인한테 주는 것도 아니고 그 연예인이 출연할 프로그램 스탭들한테 주는 선물이라니. 나도 처음엔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학창시절에도 누군가의 ‘팬질’을 해본적이 없어서, 피디가 되고 이런 선물을 처음 받았을 땐 ‘프로그램이 제일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은 나인데 왜 얘네가 나한테 잘 부탁한다고 하는거지?’ 이해가 안 됐다. 누군가를 얼마나 좋아하면 이럴 수 있는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내가 남편에게도, 심지어 딸들에게도 만들어준 적 없는 퀄리티의 도시락을 받는다. 내가 내 딸들 사랑하는 것보다 얘네가 자기 가수를 더 사랑하는 것 같다고, 농담 섞어 감탄했다. 때로는 제작진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우리 가수에게 힘든 것 시키지 말라는 항의성 메시지를 받는 건 흔하고, 다른 연예인의 팬들과 신경전을 벌이는 일도 심심찮게 있다. 라디오 오픈스튜디오인 ‘가든 스튜디오’ 앞 바닥에는 종종 전화번호가 적인 A4용지가 빼곡히 붙어 있는데, 좋은 자리에서 ‘내 가수’를 보고 싶은 팬들과 가차없이 이를 떼어내는 청소어머님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벌어지곤 한다. 그러다가 또 그 안에서 ‘자정작용’이 일어난다. “우리 가수 욕먹이는 일 하지 말자”는 말이 마법처럼 모든 걸 정리한다.

아이돌 팬들을 가까이에서 보다 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이건 정말 사랑이다. 그것도 순수하게, 맹목적으로, 뜨겁게, 앞뒤 재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하는 진짜 사랑이다. 나는 이런 사랑을 언제 해봤었나 생각해보니, 딱 10대 때 했었다. 이건 10대이기 때문에 가능한 사랑이다. 오래 활동해 전성기가 지난 아이돌들의 골수팬들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10대 때 푹 빠져 그 마음을 이어온 경우가 많다.


아이돌 산업은 10대의 사랑, 10대의 에너지로 인해 굴러가는 산업이다.

이 문장을 쓰고, 새삼 놀랍다. 10대 특유의 뜨거운 감정,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그 폭발하는 에너지에 기대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먹고사는지 모른다. 아이돌 가수, 그 가수를 만드는 기획사 매니저들,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아티스트들, 노래와 춤과 뮤비를 만드는 수많은 전문가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방송국 사람들도.... 사실은 너희들에 기대 만들어진 직업이란다. 너희들의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어른들이 먹고 산단다.

임경선 작가님이 <꿈꾸는 라디오>에 출연해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대해 이야기하신 적이 있다. 이 영화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는 탁월한 영화인데, 그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10대의 사랑’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시며 이렇게 일갈했다. “10대, 인심 써서 20대 초반 까지, 그 때의 사랑이 진짜 사랑인 것 같아요.” 영화의 배경이 내내 여름이어서, 열일곱 소년 엘리오가 사랑에 빠지는 계절로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소설에서 20대 청년 시몽이 짝사랑하는 여인 폴과 겨울 호수 앞에 앉아 있는 장면에 이런 문장이 있다. ‘조정 경기 선수 한 사람만이 그곳에 여름을 되돌려 놓기 위해 고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차갑고 딱딱한 상암동의 방송국 건물들 사이에서, 어린 팬들의 와글와글한 소음이 그나마 다른 계절을 가져오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덧.
글을 쓰며, 내가 10대 때 짝사랑하던 남자애들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 때... 내가 너무 쉽고 재미없는 사랑을 할까봐 걱정했었다. 부모님의 반대라든지, 신분 격차라든지, 불치병이라든지 하는 장애물이 있어야 드라마에 나오는 격정적인 연애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삶에는 그런 요소가 없었다. 불같은 사랑만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때, 장애물 없이 순탄한 연애는 멋 없게 느껴지던 때, 운명같은 무언가에 기꺼이 휩쓸리고 싶었던 그 때. 1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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