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브런치 글 <나에게 소명이란?>과 <숨결이 바람 될 때> 다시 읽고에서는 이 책을 읽은 소감을 적어보았다. 이번 브런치 글에서는 인상 깊었던 구절을 주제별로 정리해본다. 독서 후 주제별 정리는 처음이다. 이 책은 전체를 관통하는 뚜렷한 주제/토픽이 있고 수많은 명문이 녹아있다. 그리고 저자의 진솔하고 정직한 매력이 읽는 내내 느껴진다. 이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고, 그래서 정리를 해두려 한다.
공유하기에 앞서, 이 점을 다시 짚어보고 싶다. 이 책의 장점은 100가지도 넘게 말할 수 있지만 가장 놀랍고 아름다운 점을 꼽자면, 깊은 성찰과 정직함과 진실함으로 살아온 서른여섯살의 젊은이가 죽음을 앞 둔 마지막 순간에 세상에 아낌없이 주고자하는 마음이다. 고백컨데, 난 죽음을 앞둔 순간에 이렇게 진실되고도 아름다운 내 모습은 상상조차 해본 적도 없는 것 같다. 훌륭한 내면이 갖춰진 사람이 인생의 끝자락을 마주할 때는,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 없이 많은 이에게 울림을 주는 스토리를 만들 수 있다. 이 책이 그 증거다.
책에서 발췌한 글을 주제별로 모았다. 앞으로 내 삶의 의미를 떠올리거나, 이 저자의 영혼이 그리워지거나, 한마디로 약발이 떨어질 때 다시 떠올리고 싶은 구절들. 어쩌면 이 브런치 글이 책을 읽지 않은 분에게는 스포일러일 수 있겠다. 책을 먼저 읽으시기를 추천한다. 이미 읽은 분에겐 아름다운 구절을 다시 떠올릴 기회가 될 지 모르겠다.
책: 잘 다듬어진 렌즈처럼 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여주는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도덕 철학의 기초를 쌓았고
<햄릿>은 내게 사춘기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었다.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인간의 상호 유대감에 대한 절박한 추구를 이야기.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죽음에 관한 책들: 제니친 <암 병동>, B S 존슨 <운 없는 사람들>,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 네이글 <정신과 우주>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I can’t go on. I’ll go on)”
문학은 인간의 의미를 다채로운 이야기로 전하며, 뇌는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관이다. 내겐 그런 사실이 마법처럼 느껴졌다.
뇌의 규칙을 가장 명쾌하게 제시하는 것은 신경과학이지만, 우리의 정신적인 삶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은 문학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비추어줄 뿐만 아니라, 도덕적 반성에 도움이 되는 소재를 가장 풍부하게 제공한다고 믿었다.
무언가를 성취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에 더 끌리는 편이었다.
[폴의 의지] 삶의 마지막 몇 해 동안 폴은 목적의식을 잃지 않고 또 움직이는 시곗바늘에 자극받으며 쉼 없이 글을 썼다. 그는 어떻게든 글을 쓰겠다는 의지가 굳건했다. … 그는 사람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했다. “그저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고 싶을 뿐이지.” 물론 폴은 그저 죽음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죽음을 용감하게 헤쳐 나갔다. … 큰 야망과 부단한 노력과 더불어 모질지 않은 부드러움 또한 폴의 강점이다.
[희망한 것] (루시)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이었다.
[성품] (루시) 폴의 묘지는 투박하면서도 우아해서 평소 그의 성품과도 아주 잘 어울린다.
[비극이 아니었다] (루시) 생과 사는 떼어내려고 해도 뗄 수 없으며, 그럼에도, 혹은 그 때문에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폴에게 벌어진 일은 비극적이었지만, 폴은 비극이 아니었다.
[정직함과 진실함] (에이브러햄) 고백하건대, 이 책의 원고를 읽고 나서 나는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깨달았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몰입해서 읽은 폴의 글은 정직하고 진실했다.
해부: 너무 무신경한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별다른 말없이 자신의 슬픔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냈고, 그 표정은 어떤 강의보다도 내게 의학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다른 교수가 그렇게 자르라고 했다는 내 해명에 감독 교수의 슬픔은 분노로 바뀌었고, 갑자기 교수들은 얼굴이 벌게진 채 복도로 끌려나갔다.
책임감: 심폐 소생에 실패하고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끝까지 환자를 살리려는 영웅적인 책임감.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판단: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판단을 내리려면 지능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도덕적 명확성 또한 필요했다. 앞으로 내가 지식뿐만 아니라 지혜도 함께 얻게 될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맡겨진 역할, 즉 겸자를 든 무덤 파는 사람으로서 죽음의 시간과 방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을 충실히 해내야 한다.
암전이: 마리는 처음엔 안도했지만, 곧이어 깊은 괴로움과 수치심에 시달렸다.
소명: 실제로 99퍼센트의 사람들이 연봉, 근무 환경, 근무 시간을 고려하여 직업을 선택한다. 그러나 원하는 생활방식에 중점을 두고 선택하는 건 직업이지, 소명이 아니다.
분야 결심: 소아신경외과 의사가 그 아이의 부모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경외감을 느꼈다. 그는 치료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측면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아이의 비극적인 상황을 인정하고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는 건, 그리고 물론 당신이 잘 알겠지만, 당신의 삶이 이제 막, 이미 변했다는 겁니다. 앞으로 기나긴 싸움이 될 거예요. 남편분도 잘 들으세요. ~~.” 대화가 끝났을 즈음 아이의 부모는 여전히 편치 않은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닥쳐올 일과 마주할 준비는 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창백하고 칙칙하고 멍해 보이던 그들의 얼굴이 결연한 표정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였다.
서류와 환자: 나는 분노와 슬픔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다. … 그때부터 나는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
실수 인정하기: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할 일은 단 하나야. 내 얼굴을 똑바로 보고, ‘미안해. 그건 내 실수였어.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할게’라고 말하면 돼.” “하지만 그 간호사가…”, “아냐. 진심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해. 다시 해봐.”. “하지만…”. “어서 말하라니까.”. 이런 식으로 한 시간이 흘러갔고 나는 그가 의사로서 성공하기는 틀렸다는 걸 알았다.
메스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면, 외과의가 선택할 수 있는 도구는 따뜻한 말뿐이다.
모든 위험을 최대한 빠르게 줄줄 읊어주는 법적 행동이 아니라 고통받는 동포와 굳은 약속을 맺는 기회가 되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함께입니다. 여기 헤쳐 나갈 길이 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당신을 회복의 길로 인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 그리고 내가 맡은 환자의 안녕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버지가 환자들과 이렇게 편하게 지내며 신뢰감을 심어주는 모습은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의사의 책무는 무엇이 환자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지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지켜주려 애쓰되 불가능하다면 평화로운 죽음을 허용해 주는 것이다. 그런 책무를 감당하려면 철두철미한 책임감과 함께, 죄책감과 비난을 견디는 힘도 필요하다.
우리는 사람의 생사가 걸린 일을 책임져야 하는 힘겨운 멍에를 졌다. 우리 환자의 삶과 정체성은 우리 손에 달렸을지 몰라도, 늘 승리하는 건 죽음이다. 설혹 당신이 완벽하더라도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이에 대처하는 방법은 상황이 불리하여 패배가 확실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환자를 위해 끝까지 싸우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완벽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거리가 한없이 0에 가까워지는 점근선처럼 우리가 완벽을 향해 끝없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있다.
[I’ll go on] 그날 아침 나는 결심했다. 수술실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기로. 왜냐고? 난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바로 나니까.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회 방문객과도 같지만, 설사 내가 죽어가고 있더라도 실제로 죽기 전까지는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의사의 의무] 나는 히포크라테스나 마이모니데스, 오슬러도 가르쳐주지 않은 뭔가를 배웠다. 의사의 의무는 죽음을 늦추거나 환자에게 예전의 삶을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무너져버린 환자와 그 가족을 가슴에 품고 그들이 다시 일어나 자신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마주 보고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돕는 것이다. 에마는 나의 옛 정체성을 되돌려주지는 않았다. 대신에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내 능력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하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다. (내 정체성!)
[에마가 지켜주는 것]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고 싶다면 신경외과의를 그만둘 수도 있죠. 하지만 몸이 아프다는 게 이유가 돼서는 안 돼요. 저번 주와 증세는 별 차이가 없어요. 이번 일은 도로에서 장애물을 만난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어쨌든 당신은 현재 궤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어요. 신경외과는 당신에게 중요하니까요.”
[의사와 희망] 그녀는 내게 호소하듯이 말했다. … 이런 일을 진정으로 통제하는 힘으로 가진 존재에 호소하고 있었다. … 그녀와 나는 … 지금 이 순간에는 평범한 두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 결국 의사도 희망이 필요한 존재였다.
[의미] 결정적인 전환점에서 요점은 단순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이다. 신경성 질환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성찰] 내가 이 직업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을 뒤쫓아 붙잡고, 그 정체를 드러낸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 생사의 순간에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 순간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태양을 직접 응시하며 천문학을 배우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나는 결정적 순간에 환자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그거 그 순간에 서 있을 뿐이었다.
[성찰]… 다른 급한 일들 때문에 환자들의 고통을 외면했던 일. 내가 진찰하고, 기록하고, 몇 가지 진단으로 깔끔하게 분류해 버린 환자들의 고통, 그리고 내가 보지 못한 고통의 의미들이 전부 부메랑이 되어 내게로 돌아왔다. 복수심에 불타고, 분노하고, 냉혹한 모습으로. 나는 톨스토이가 묘사한 정형화된 이미지의 의사, 무의미한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기계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변해가고 있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인간적인 의미를 완전히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이해] 나는 환자의 뇌를 수술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정체성, 가치관, 무엇이 그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지, 또 얼마나 망가져야 삶을 마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 수술에 성공하려는 헌신적인 노력에는 큰 대가가 따랐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가피한 실패는 참기 힘든 죄책감을 안겨주었다. 이런 부담감은 의학을 신성시하면서 동시에 불가능한 영역으로 만든다. 의사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지려다가 때로는 그 무게를 못 이겨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정직] 브이는 내가 아는 다른 과학자들과 달랐다. 말투가 부드러웠고 환자들과 임상의 사명에 큰 관심을 기울였으며, 종종 자신도 외과 의사였다면 좋았을 거라고 고백했다. 나는 과학이 어느 분야 못지않게 정치적이고 경쟁이 치열하고 공격적이며 쉬운 길을 찾으려는 유혹으로 가득한 학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브이는 늘 정직하게(때로는 겸손하게) 전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탁월함] 기술적인 탁월함이 곧 도덕적 요건이라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내 기술에 정말 많은 게 걸려 있거나, 불과 1-2밀리미터 차이로 비극과 성공이 갈릴 때에는 좋은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실존적 진정성] 일반적으로 환자가 원하는 건 의사가 숨기는 과학 지식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찾아야 하는 실존적 진정성이다.
[나에게 중요한 가치와 시간]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꼭 생각해 보세요.”... 내 가치를 찾는 건 내게 달린 문제였다. 하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선 그 말이 공허한 핑계처럼 느껴졌다.
시인 알렉산더 포프: 어설프게 배우는 건 위험한 일이다. 뮤즈의 샘을 흠뻑 마시든가, 아니면 아예 입에 대지 말라.
[주어와 목적어] 나는 내 삶의 모든 문장에서 주어가 아닌 직접 목적어가 된 기분이었다.
[동료와의 비교] 나와는 다른 삶의 궤도를 따라 맹렬히 달리고 있었다. 나는 거꾸로 돌리는 크리스카스 캐럴에 갇힌 기분이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글들] 내 경험을 언어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밍웨이 역시 비슷한 형태의 저술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 풍부한 경험을 하고 충분히 사색한 뒤 글을 쓰는 것 말이다. 내게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글들이 필요했다. 결국 이 시기에 내게 활기를 되찾아준 건 문학이었다.
[집게발] 승리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게의 집게발에 붙잡힌 기분이 들었다. (이중섭의 <소와 새와 게>를 연상)
[과학과 인생] 고유하고 주관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실존적이고 본능적인 성질에 과학 지식을 적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과학은 경험적으로 재현 가능한 정보를 체계화하는 데 가장 유용한 방식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과학의 능력은 역설적으로 인생의 가장 중심적인 측면들(희망, 두려움, 사랑, 증오, 아름다움, 질투, 명예, 나약함, 부단한 노력, 고통, 미덕)을 포착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아이] 한쪽 팔로 아이의 무게를 느끼고 다른 팔로 루시의 손을 잡고 있으니 삶의 가능성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 내 앞에 펼쳐진 넓은 지평선에서 나는 공허한 황무지가 아니라 그보다 더 단순한 어떤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계속 글을 써 내려가야 할 빈 페이지였다.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 단 한가지 뿐이다. 그 메시지는 간단하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졌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미완성] (루시) 하지만 미완성이야말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 폴이 직면한 현실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사랑과 응원] (루시) 불치병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서로에게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며, 감사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이렇게 내가 당신 가슴에 머리를 대로 있어도 숨 쉴 수 있어?”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이게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폴과 내가 서로의 삶에 깊은 의미가 될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동반자] (이종인: 옮긴이) 평소 죽음이 무엇인지 깊이 명상하여 그 죽음을 삶의 동반자로 여기는 사람다운 선택을 한 것이다.
[몫] (이종인) 산을 쌓아 올리다가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했더라도 그것 역시 자신이 감당할 몫이라면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