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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버질 아블로,
내 영감의 원천

[#37 Paris] Inspired By Virgil Abloh

by 재니정

이번 에피소드는 구독자들의 요청에 특별히 한주 더 일찍 업로드합니다.




아래글은 내가 올해 1월에 작성했던 글이야.




이번 파리에서의 한 주를 요약하자면 루이비통에 푹 빠져있었어. 물론 루이비통 제품을 샀다는 얘기는 아니고. 회사 동료 몇명을 집에 초대해서 저녁을 먹는데 버질 아블로 (오프 화이트의 디렉터이자 루이비통의 남성복 디자이너)가 기획한 루이비통 팝업 매장 소식을 들었어. 평소 럭셔리 브랜드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버질 아블로는 워낙에 좋아하던 터라 바로 주말에 들러보기로 계획을 잡았지. 하필 그날은 파리에서 4년만에 눈이 오던 날이었어. 거기다 주말에 간 터라 줄에 꽤 길게 늘어서서 1시간 동안 추위 속에 기다려야했지. 겨우 입장하게 된 팝업 스토어를 부지런하게 둘러보며 느낀 생각은 이거였어.


"버질 아블로가 버질 아블로했다"

팝업 매장의 전반적인 디피는 2021 루이비통 S/S컬렉션을 모아놓은 것이었지만 난 그보다는 버질이 큐레이팅 해놓은 서적들과 사진 이미지들, 그리고 공간의 전반적인 디렉팅에 더 관심이 갔어. 평소 난 그에 대해 늘 궁금한 점이 있었거든. '저 사람은 평소에 어디서 어떤 영감들을 얻길래 매번 이렇게 분야를 넘나드는 엄청난 작업들을 선보이는 걸까?' 패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나이키와의 "더 텐" 프로젝트에서부터 에비앙, 리모와, 이케아와의 협업까지... 이 사람에게 창작의 한계란 있을까? 이 사람의 머릿속에는 어떠한 영감들이 우글거리고 있는걸까?




그리고 이 글을 쓰는 29일 바로 전날 밤. 버질 아블로가 암으로 사망했다는 기사 소식을 들었어.

나로서는 가장 큰 영감의 원천이었던 한 인물이 사라졌다는 충격으로 한동안 실감이 나지 않았지. 인스타그램에서 모든 패션, 팝컬쳐 관련 계정들이 그의 사진을 포스팅하며 추모하는 피드를 보고 그가 현대 문화사에 남겼던 영향력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어.

이번 편지에서는 향년 41세 나이로 고인이 된 버질 아블로를 추모하며, 그가 내게 남겼던 디자인적, 예술적 영감의 요소들을 몇가지 써보려고 해.


내가 버질 아블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이 가기 시작했던 시기는 그의 오프 화이트 컬렉션과 나이키와 함께 협업한 ‘더 텐' 시리즈가 유명해지기 시작했던 때인 것 같아. 당시 나도 내브랜드를 기획하던 중 텍스트와 인포그래픽적인 요소들이 담겨진 디자인에 한창 빠져있었고, 내 머릿속에 있던 이미지와 스타일이 비슷하게 구현된 한 브랜드의 제품들이 눈에 띄게 되었지. ‘이건 어디 브랜드야?’ 하며 찾아보니 죄다 오프 화이트더라고.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 뒤에서 브랜드를 진두지휘하던 디자이너의 이름을 듣게 되었지.


“Virgil Abloh”

이 디자이너의 활약은 좀처럼 끝날줄을 몰랐어.

‘너가 왜 거기서 나와?’ 라고 다들 반응 했을법한 루이비통의 남성 아트 디렉터가 되지를 않나, 온갖 난해하고 기상천외한 협업들을 선보이지 않나…

2019년 그의 첫 루이비통 컬렉션이 공개되었을때 칸예 웨스트와 조우하며 눈물을 흘리고 모두가 그들을 축복하는 모습을 보며 ‘이제 스트릿 놈들의 세계구나' 라는 생각마저 들었어. 그만큼 버질 아블로는 홀로 패션계의 판도를 뒤집어 놓은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말할 수 있을거야.


DgQusdfW0AMHItH.jpg (버질과 칸예의 조우, 각기 다른 분야에서 탑이 된 서로를 보며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을 느꼈을 것이다.)


버질이 내게 남긴 미학적인 영감들을 얘기하자면, 우선 그는 ‘크리에이터'보다는 ‘에디터'에 가까운 사람이야. 나이키와 함께한 ‘더 텐' 프로젝트를 예로 들자면 그는 신발을 디자인한게 아니거든.

기존에 있던 나이키의 상징적인 10개의 제품에 자신만의 감각을 더하고 재배치하고 라벨을 단거지. 어떻게 보면 커스터마이징에 더 가까운데, 그의 디자인 철학을 보면 기성제품(레디메이드)에 포인트 몇가지를 바꿔가며 창작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지. 재미있는 점은 이게 현대미술의 문법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점이야. 마르쉘 뒤샹의 등장 이후로 현대미술은 기존의 사물에 새로운 개념을 덧대는 방식을 즐겨 해왔어. 변기와 자전거 바퀴를 미술관에 옮겨오고, 담배 파이프를 보여주며 새로운 개념을 질문하는 방식으로 말이지. 이러한 방식으로 예술은 예술이 가져야 할 오브제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그 영역을 확장했어. 반드시 액자안에 들어 있어야 하고, 벽에 걸려야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거지.


art-06.jpg (기존 사물에 새로운 가치를 더하는 현대 미술은 버질의 디자인 철학과도 닮았다.)


또 한가지 현대미술의 특징 중 하나는 이미지보다는 텍스트적인 미학을 추구한다는 점이야. 이제는 더 이상 풍경이나 인물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것이 수준 높은 예술의 기준이 되지 못해. 그 안에 담겨있는 메시지나 텍스트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 현대 예술의 특징인데, 버질 아블로의 디자인에서도 이러한 부분들이 엿보여. 그의 제품마다 시그니처처럼 박힌 작은 따옴표의 인용구 표현이 가장 큰 예라 볼 수 있지. 한마디로 오브제의 이름을 다시 써 넣음으로써 그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재정립하려는 의지가 보여. 실제로 그의 한 강의에서는, ‘나는 포토샵이 아닌 키보드로 디자인한다' 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지.


이처럼 버질 아블로는 현대미술의 개념적인 요소들을 패션에 적용하는 한편, 음지에서 자기들끼리 담을 쌓고 살아가던 스트릿 문화를 패션계에 대중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한마디로 ‘ 하입(Hype)’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가구를 판매하는 가족적인 분위기의 이케아에 마치 슈프림, 나이키 드랍을 기다리는 추종자들 마냥 줄을 서 버질과의 협업 제품을 구매하려는 사람들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

기존의 차고 넘치는 제품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감각과 번뜩이는 재치를 덧붙이는 것만으로 문화의 한 축을 바꿔버린 버질 아블로 에게는 얼마나 많은 영감과 창작의 원천들이 존재했을까?

한때 고급 브랜드의 인기 없는 옷을 다량 구해와 새로운 디자인을 입혀 몇배에 달하는 가격에 판매했던 Pyrex 프로젝트 (그는 브랜드라기보다 프로젝트라고 표현한다.) 처럼, 어쩌면 이 모든 활동들이 그에게는 ‘실험적 프로젝트' 이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기존의 문법을 따라가기 보다는 힘을 빼고, 즐기며, 차분히 내적안에 쌓여왔던 창작적 자본들을 하나하나씩 쏟아냈을 뿐이었을지도.


이브 생 로랑이 프랑스 패션의 방향을 바꿔놨고, 스티브 잡스가 전자제품의 개념을 바꿔놨듯, 버질 아블로는 디자인과 편집이라는 방식을 뒤집어 놨어. 그리고 우리는 또 한 천재가 새롭게 만들어 놓은 판에서 그 다음 변화를 기다리며 수많은 아류작들에 파묻히게 되겠지. 앞으로의 흐름과 그 변화를 기대하며

버질에 대한 글을 마치려고 해.


Farewell, My Inspiration.


2021.12.1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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