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누시 코르차크(JanuszKorczak/폴란드교육자/1878-1942)
We do not know the child.
Worse, we have a prejudiced view of him.
(출처: M. Wolins(Ed.)(1967). Selected works of Janusz Korczak. Warsaw: Scientific Publications Foreign Cooperation Center of the Central Institute for Scientific, Technical and Economic Information of Warsaw.p.322.)
가끔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아이를 잘 알고 있나?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떤 남자아이를 좋아하는지 동네 엄마에게 들었다. “애들끼리도 다 알던데?”라는 그 엄마의 말에 웃었지만, ‘음, 딸이 내게 모든 걸 말하지는 않는군.’ 하는 생각이 나를 새롭게 일깨웠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이는 친하게 지내던 아이 **와 어느 순간부터 놀지 않았다. 또 다른 동네 엄마에게 들었다. “언니, 애들이 점심시간에 학교 운동장 옆 울타리를 넘어서 꽃을 밟으니까 언니 딸이 울타리에 ‘넘어가지 마세요.’라고 써붙였대. 그러니까 **가 “야, 그런다고 애들이 안 넘어갈 것 같아? 쓸데없는 짓이야. 넌 참 세상을 모르는구나. ”라고 했대.” 사람들은 다 아는 우리 아이 이야기를 난 왜 한참 지나서야 듣는 것일까.
중학생이 되기 전 겨울, 아이는 중학교 생활에 대해 사촌 언니와 1시간이 넘는 통화를 한다. 밤 11시가 넘었는데도 하하호호 즐거운 소리가 문을 넘어 거실까지 들렸다. 그리고 나온 아이는 밝은 표정으로 무척 값진 대화였다고 말했다. 난 아이가 중학생이 되는 것에 대해 불안이나 부담이 있을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때에 맞춰 교복을 찾아오고, 가방과 신발을 준비했다. 아이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먼저 중학생을 2년 보낸 사촌 언니에게 공부 잘 하는 법, 친구들과 지내는 법 등 여러 가지를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중학생 때가 되어서야 겨우 아이의 “괜찮아요.” 암호를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다. 더 먹으라고 하거나 주려고 할 때 아이는 “괜찮아요.”를 자주 하곤 했다. 난 그래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밀어주듯 주곤 했다. 그런데, 그건 “분명히 싫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중학생이 된 아이는 그 말의 뜻을 아주 아주 자세히 설명했다. “싫어요.”라거나 “됐어요.”라고 하면 상대방이 마음 상할 것 같아서 자기는 “괜찮아요.”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이의 “괜찮아요.”는 몇 년이나 듣던 말이지만, 그 뜻은 몇 년 후에나 알게 되었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나는 항상 아이에게 놀란다. 나는 아이를 알지 못한다. 이것을 인정하고, 실천하는 것은 한순간에 되는 일은 아니다. 계속 새로운 눈으로 아이를 보려고 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아이는 어제와 다르고, 지난 달과 다르고, 작년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