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망중한이라고 집중해서 본 영화가 있으니 "혼자사는 사람들"이라는 영화다.
러닝 타임이 비교적 짧기도 하고 추리물을 좋아하는 내가 추리물인줄 알고 보기 시작했다. 보다보니 장르는 전혀 추리물은 아니고 심령영화인가 싶은 대목도 한두군데 있지만 이후는 휘익 경로를 틀어서 결국은 휴먼드라마였던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 (2021년)
감독 : 홍성은
출연 : 공승연, 정다은, 서현우, 김모범, 김해나, 변진 등.
주인공 진아 (공승연)은 크레딧카드 회사 상담원이다. 매일 거의 같은 옷을 입고 매일 같은 시간에 직장에 나가서 거의 아무랑도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서 일을 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또 비슷한 시간에 귀가한다. 오랜만의 외출은 본가 방문. 얼마전 돌아가신 엄마가 바람이 나서 집나갔던 아버지에게 전 재산을 남긴다는 서류에 도장을 찍으러 엄마의 집에 들른 것이 다다. 전화라고는 철없는 아버지가 거짓말로 병원에 입원했다느니 아프다느니 엄살을 부리며 관심을 끌려고 하는게 다다.
어느 날 저녁에서 혼자 밥을 먹는데 크게 바닥이 흔들릴 정도의 쿵 하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젓가락질을 멈추고 한동안 온몸이 굳어 있었던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매일 출퇴근 할 때마다 자기 아파트 문 앞 복도에 나와서 담배를 피고 있던 오타쿠 청년이 자신이 수집하던 만화책 더미가 갑자기 무너져서 거기에 깔려 죽은 것. 가족 없이 살던 그가 고독사를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아의 생활은 달라질 것이 없다. 대인관계 스킬 제로인 진아는 특유의 무관심과 무미건조함이 플러스로 작용해서 아무리 진상고객을 만나도 담담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최고의 실적을 자랑한다. 그 최고 실적때문에 진아로서는 최악의 새 업무를 담당해야하는데, 바로 신입 교육. 새로온 수진 (정다은)은 아빠의 사랑을 가득 받고 자란 해맑은 젊은이. 소녀티를 갓 벗은 신입과 상극인 진아는 매일매일이 괴롭다.
이런식으로 영화는 흘러간다.
난 처음에 옆집 남자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지점에서 추리물인줄 알았다가 또 다른 대목에서는 뭔가 심령요소가 있나 했는데, 결국은 정말 '혼자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 영화평 한번 써보려고 검색하다보니 잔잔한 영화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이러한 요소들이 불필요한 탈선같이 느껴졌나보다. 난 만약 이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하기만 했다면 오히려 선택을 안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너무 '소소하고 잔잔한~'류의 영화나 이야기는 별로 안좋아한다. (생각해보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라는 영화는 잔잔해도 좋아하는데 이건 예외인거 같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하면 스포일러일 것 같아 자세한 스토리는 생략하지만, 뭐 스포일할 것도 없다. 펄쩍 뛸 정도로 재미있다거나 머리를 얻어 맞은듯 충격적이었다거나 가슴에 무거운 돌이 내려앉은 듯한 깊은 감동은 없다. 하지만 혼자 사는 사람 진아를 통해서 보여주는 남루한 인생을 살아가며 자신의 인생과 화해해가는 과정이 꽤나 감동적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도 다 좋았다. 진아라는 주인공 공승연이라는 배우가 인기 아이돌 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정연의 언니라고 한다. 난 처음 보는 배우였고 아이돌 그룹도 잘 모르지만 참 예쁜데 연기를 너무 잘했다. 그녀가 맡은 역이 워낙 감정 표현이 없고 기복없는 성격이라 오히려 연기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데 말이다. 폭발적으로 화를 내거나 열정적으로 대사를 뱉어내는 연기도 어렵겠지만 적어도 관람객 입장에서는 그 인물의 감정을 쉽게 읽어 낼 수 있다. 그런데, 눈썹을 잠시 치켜뜬다던지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던지 아니면 그냥 공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만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연기하는 이나 관람객의 입장이나 섬세한 감정선의 추적이 필요하니 더 까다로울 것 같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아직 경력이 길지 않은 여배우인데 무척이나 연기를 잘했다. 그녀의 연기선이 섬세해서 나는 경험하지 못한 세계인데도 쉽사리 동화되어 집중해서 영화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해맑지만 일머리는 다소 떨어지는 신입 수진으로 나왔던 정다은 배우도 역할이 성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잘 해냈다. 솔직히 이 신입사원의 돌발 행동으로 뭔가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려나 잠시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내가 끝까지 이 영화 장르를 모르고 분위기 파악 못했다는 얘기도 된다. 진아와 수진이 일하는 상담 센터의 책임자 역으로 맡은 배우도 정말 저런 사람 있을 것 같은 오버 없는 자연스러운 연기로 전반적인 흐름을 안정적으로 잡아주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겉으로는 건조하지만 끈끈한 주인공과 센터장의 관계도 좋아보였다.
큰 사건이라고 말할 것이라고는 이웃 청년의 고독사 밖에 없는 영화이고 나머지는 지리멸렬한 인생의 모습들의 단편이다. 하지만 한시간 반 동안 외로운 주인공과 그 주변의 역시 외로운 사람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영화가 끝나고 나서 새삼 나의 삶과 나아가 인간의 삶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남루함 속에서 그 안에서 작은 빛을 찾아내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라 보고 나서 여운이 남았다. 워낙 수도 많고 그만큼 퀄리티는 떨어지는 작품들이 많은 넷플릭스다 보니 끝까지 보지 않은 영화나 드라마가 많은데 1시간 반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이긴 하지만 내가 끝까지 집중해서 봤다는 것 만으로도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