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2일로 마감한 전시라 가보시란 말은 못드리겠다. 아니 그런 권유도 필요 없이 이미 많은 분들이 전시관람을 하신 전시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1월21일에 갔는데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을 보면 인기 높은 전시임에는 분명하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내가 지난 몇 달간 계속된 감기로 지극히 제한된 생활 반경 속에서 미니멈한 일상의 의무만 하면서 살아서 마지막 날 다 될 때까지 전시를 보러가질 못했다가 전시 마지막 바로 전날 가까스로 다녀왔다. 더현대는 가기 전에는 교통이 불편해, 교통정체가 심해, 사람이 많아 가기를 좀 망설이지만, 정작 그 곳에 가면 놀거리 볼거리 먹거리가 많아서 ALT.1의 전시를 보러가면 오래도록 그 곳에 머물게 되는 곳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계속 미루다가 전시 마치기 하루 전에서야 다녀왔는데, 왠걸 사람이 많아 꽤 붐볐다. 그 정도로 인기가 많은 전시였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기대 이상으로 좋은 전시였다는 점이다. 솔직히 일본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해서 그렇고 그런 전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나보다. 내가 알게 모르게 모더니즘 미술적 위계 개념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반성했다.
다만, 이 때까지 수많은 블친들이 강조했던 유코 히구치의 '괴기스러운' 일면에 대해서는 그다지 강렬한 인상을 받지 못했다. 공포스러운 분위기 안에서도 그녀만의 시정이 담겨 있어서 부드러워져서 인지도 모르겠다.
작품 수가 어마무시하게 많고 큰 작품은 물론이고 작은 작품도 자세히보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알만하게 정교하고 섬세한 작품들이었다. 작품 수와 활동 분야를 보니 작가가 엄청나게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홈페이지도 갖고 있었다. 관심이 생겼는데 전시를 못보신 분이라면 홈페이지에서 살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유코 히구치는 대다수의 일본사람들처럼 고양이를 좋아하나보다.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구스타브였는데, 고양이의 몸에 뱀의 팔, 그리고 문어의 다리를 한 생물이다. 작가가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보면 볼수록 신기한 인물이다. 게다가 암컷인지 새끼들도 10마리나 있다. 실제로 보면 징그럽다고 꺄아까아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상상의 나래를 펴며 생각하니 귀엽고 신기하다. 왜 이런 생물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은 것일까? 궁금하다.
이미 지난 전시이고 이제까지 미술 전시 전문으로 다루는 블로그와 인스타에서 전시 중인 작품들 사진들은 많이 게재되어 있었기에 오늘은 유코 히구치의 작품들 중에 미술사적 레퍼런스가 있는 작품들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공간은 전통 일본 미술을 참조해서 만든 작품들이 걸려있는 곳이었다. H.Point에 있던 오디오 가이드에서는 각 공간의 이름이 있었는데 지금 보니까 전시가 지나서인지 그 가이드가 없어져서 확인이 안된다.
개인적으로 괴기스러운 분야에서 특히 상상력 풍부한 일본 미술이라고 생각하는데 유코 히구치의 상상력의 영역에도 일본적인 DNA가 녹아 있는듯. 동영상 촬영이 안되어서 여기서는 표현이 안되지만 아래 달빛 비치는 창 밖으로 요괴가 왔다갔다 하는 방이다.
아래는 18세기 린파를 창시한 오가타 코린의 풍신뇌신 작품을 참조하여 그린 작품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인데 유코 히구치는 그녀의 대표 캐릭터인 고양이로 변형시켜 표현했다.
이토 자쿠추도 독특한 회화세계를 가지고 있어서 일본 미술사에 빛나는 인물이다. 원작에는 수국이 핀 화원에 수탉과 암탉이 그려져 있는데, 유코 히구치는 주변에 다른 생물들과 다소 괴기스런 생물들이 그려진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암탉의 자리에 구스타브를 그려넣었다.
귀여운 테디 베어인데 해부된 모습으로 만든 <나이조 짱>이라는 작품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냥 괴기스러운 인형이지만, 18세기 해부학의 관심과 함께 유행했던 해부학적 비너스의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아래 두 작품은 따로 설명 안해도 미술에 조예가 조금 있는 분들이라면 금방 아실만한 작품. 마티스의 <이카루스>와 <춤>이라는 작품이다.
아래 작품은 조르조 데 키리코의 <불안한 뮤즈>라는 작품을 참조한 작품이다. 원작과 거의 유사한 작품인데 그녀의 구스타프가 동상의 머리쪽과 먼 곳의 성의 윗쪽으로 빼꼼히 내다보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탈리아 작가인 조르조 데 키리코는 형이상학파라고 구분되는 사조의 작가로 초현실주의가 대두하기 이전에 초현실주의 화풍의 작품으로 작업했던 작가로 이후 초현실주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던 작가다.
인간은 부정적인 상상력에서 더 능력을 발휘하는듯하다. 보쉬뿐 아니라 대부분의 작가들이 천국의 묘사보다는 지옥의 묘사에서 더욱더 다채롭고 풍요한 이미저리를 그려낸다. 그 중에서 보쉬의 지옥의 모습은 정말 지옥에 다녀왔나 싶을 정도로 생생하고도 끔찍하다. 그의 탁월한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보쉬의 상상력은 이후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오늘날 유코 히구치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 이 작품에서 유코 히구치의 필력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일러스트레이터 유코 히구치의 작품은 그 밖에도 영화 포스터도 있고 입체 작품들도 있었는데 다 그녀 특유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붉은 색을 참 잘 쓴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전시를 미리 봤더라면 더 일찍 널리 알릴 수 있었을텐데, 마치기 하루 전에 봐서 아쉽다. 다음번에 유코 히구치의 전시 소식이 들리면 조금 일찌감치 다녀와보리라 다짐하면서 리뷰를 마친다.
* 해부학적 비너스 - the Anatomical Venus
https://blog.naver.com/eunicemin/222664151366
* 확 땡겨서 줌으로 보는 작품 1-브뤼헬의 <바벨탑>
https://blog.naver.com/eunicemin/2224043413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