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거꾸로 가는 시간이 불편하지도 않니?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이름 한 번 희한하게 긴데, 외면 도무지 잊기 어려운 제목이다. 스물다섯에 우연히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됐다. 감상 소감은 “이 영화, 공포스럽기 짝이 없다” 였다. 난 아무래도 벤자민처럼 살 베짱은 없는 사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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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엔 스물다섯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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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유달리 젊음에 박한 건 그건 누구나 한번은 겪게 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스물다섯을 아끼는 편이지만, 한량 같은 내 스물다섯이 누군가에겐 도태된 청춘일지도 모른다. 그런 판단은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다. 나 또한 뭐 같았던 열아홉 살을 좋게만 기억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누가 타임머신을 태워 보내준다고 하면 당연히 가지는 않을 거다. 어디서 굴러온 코로나가 도태되지 않고자 열심히 살아온 지난 시간을 “불합격”이라는 단어로 무자비하게 후려치게 될지 누가 알았을까. 근래 내 뜻대로 된 건 배가 고플 때, 밥을 잘 차려 먹어 적당히 포만감을 느꼈던 것, 딱 그거뿐이다. 애매한 사람이 도태되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 열세 살에는 벤자민 버튼과 같은 삶을 꿈꿨다. 마크 트웨인이 그랬고, 누구나 한 번쯤 그런 터무니 없는 상상을 하니까. 스물다섯 살의 나는 열세 살의 나보다는 나아도 훨씬 나은 사람일 거라는 자기 확신이 있었다. 상향 곡선의 성적표가 보기 좋은 것처럼, 그렇게 내 인생은 보기 좋은 인생일 거라 판단하는 편이 쉬웠다. 그건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편한 방법이기도 했다. 미래의 정민을 믿고, 잘해야 한다는 현재의 부담을 걔한테 던져버리기, 그건 현재를 치열하게 사는 것보다 쉽고, 편했다. 물론 요즘의 나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긴 하지만, 어쨌든 간에 열세 살에는 벤자민 만큼이나 살판 난 인생을 상상하곤 했다. 남들과 다른 시간을 사는 그가 부러웠다.
그 마음을 고쳐 먹기까지는 십이 년이 걸렸다. 거꾸로 사는 인생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란 걸 비로소 깨달아서가 아니다. 열세 살과 비교하여, 지금은 어느 정도 자기 혹은 주제 파악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벤자민의 시간은 축복이 아니라, 신이 주는 “끔찍한 인생” 형벌 같은 것에 가깝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젊어짐으로 죽음의 시간을 센다는 건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거랑 마찬가지라는 걸 알게 된 이상, 차라리 늙으며 죽는 게 낫겠다 싶다. 내가 벤자민이었다면, 날마다 “오늘 뒤지면 어쩌지!” 되뇌며, 끝없는 무기력에 빠져 살았을 게 분명하다. 둘째, 벤자민의 시간을 산다는 건, 일방통행의 길에서 홀로 역주행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으며 만남이 많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란 걸 배웠다. 만남의 수만큼 이별이 있다는 걸 까먹지 않으려 노력한다. 혼자라서 고독한데, 그걸 또 영원히 해야 한다니! 아직도 사람과 헤어지는 일에 익숙치 않는 나에겐 스물다섯엔 스물다섯을 사는 평범함이 가장 잘 어울린다. ⠀ 벤자민은 어째서 단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원망하지 않았을까?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걸 놓아 버렸어도, 누구든지 그럴 수 있다며 이해했을 거다. 내 그릇이 밥공기 정도라면, 벤자민의 그릇은 다라이(대야) 양푼 정도 되는 거 같다. 벤자민의 편지에 때아닌 용기를 얻은 건 그에 대한 존경이 생겼기 때문이다. 벤자민은 늘 <너무 늦지 않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 아닌가? 속셈이 다 보여도 모른 척 한번 믿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 “가치 있는 것을 하는 데 있어서 늦었다는 것은 없다.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하는데 시간의 제약이란 없다. 너는 변할 수 있고 혹은 같은 곳에 머무를 수도 있지. 규칙이란 없는 거니까. 최고로 잘할 수 있거나 최고로 못할 수도 있지. 난 네가 최고로 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중략)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기를 바란다.” 매일 벤자민의 편지를 떠올려 무기력한 몸뚱이를 일으킬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