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루틴은 단순하다. 샤워를 할 때는 조정석의 <아로하>, 전미도의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미도와 파라솔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를 반복해 듣는다. 자기 전에는 꼭 <슬기로운 의사생활> 본다. 틀어 놓고 딴짓을 하더라도 꼭 틀어 두어야 마음이 편하다. 한 달 동안 그렇게 잠에 들다 보니, 고요 속에서 잠에 드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이제는 유튜브를 틀지 않더라도, 원하는 장면만 골라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나의 주접은 오늘 면접에서도 되풀이됐다. 좋아하는 콘텐츠랑 최근 본 콘텐츠가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에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말해 버렸다. 머리로는 “쟈스민, 1차 면접에서도 그거 이야기했잖아. 제발 다른 거 이야기해.” 하는데 이미 입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솔직히 다른 게 생각나지 않았다. 뇌는 너무 솔직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아는데, 주접이 한 번 가동된 입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트럭 같다. 과몰입하지 않고, 적당히 좋아하는 친구들이 부럽다. 요즘 내 상태는, “과몰입하지 마...”, “아니,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이다.
과몰입하는 게 내 장점일 수도 있다. 흥미가 생기면 끝까지 몰입하는 인내력은 있다는 거니까. 빠른 학습이 필요할 때, 심지어 유용하기까지 하다. 명분이야 만들면 되는 거고, 빠져 들면 최소 한 달만에 전문가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난 오아시스로 시작해서 브릿팝의 역사를 줄줄이 외기도 했었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좋아서 영화 대본, 원서, 번역본, 원서에 언급된 다른 문학서까지 다 읽어보는 대단히 변태적인 집착으로 자칭, 타칭 그 영화의 전문가이던 시절도 있었다. 크리티컬 한 단점은 하나에 매몰되어 정작 주변을 살피지 못하기도 한다는 거다.
왜 나는 이렇게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과몰입하는가? 과몰입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과몰입 이유 첫째,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주인공이 다 전문직이다. 만날 “나 뭐 해 먹고살지!”를 고민하는 취준생에게 중요한 건, 주인공의 직업뿐. 러브 라인이나, 서사에 몰입하던 철없는 시기는 지났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며, 그래, 이익준은 저렇게 천진한 성격일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대학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전문직 중에서도 상급이 아닌가. 친구들은 별안간 약대 모집 공고를 찾아봤다거나, 이번 연도를 마지노선으로, 취직이 안되면 차라리 대학원을 가겠다는 소리를 해댄다. 열아홉에는 인문학과 사회를 공부하고, 사색하고 통찰하는 사람들이 멋져 보였다. 몰라서 쉽게 가질 수 있었고, 마음껏 꿈꿀 수 있어서 빛났던 포부들은 잃은 지 오래되었다. 문과생의 가치를 몰라주는 사회가 밉다가도, 그래, 너네도 방법이 없었겠지 타협하는 나를 보며, 순수한 마음을 서서히 잃어가는 게 나이가 먹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브로콜리너마저의 <졸업>도 참 무서운 노래이다.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미친 세상이라 팔리지도 않는 문과생, 그럼에도 팔려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며, 하고 싶은 일과 잘 맞는 일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일들인 사람들이 부러웠다.
과몰입 이유 둘째, 바빠 죽을 텐데, 걔네들은 밴드까지 한다. 가질 수 없어도 탐나는 재능이 있다. 내게 악기를 다루는 음악가들이 그런 사람들인데, 난 그들의 재능과 끈기, 그리고 음악을 향한 사랑을 동경한다. 얼마 전, 작은 펍에서 봤던 인디 밴드의 공연이 떠올랐다. 마지막 노래를 남기고 공연 중간에 기타 줄이 끊어졌다. 기타 주인은 연주를 하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노래에 맞춰 기타를 치는 시늉을 했다. 심지어 웃으면서! 공연은 보는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한 게 잠시 부끄러웠다. 우린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상에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의 끝판왕은 영화를 만드는 거라는데, 음악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면 하고 싶고, 그 마음이 커지면 숨길 수 없어서 꼭 해야 하는 게 사람이니까. 하고 싶다는 이유로 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하는 양석형이 부러웠다. 살면서 계속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다.
대학교 2학년 때, 철학 교양 수업을 들었었다. 그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엄청 큰 돌 덩어리를 정상까지 힘들게 끌고 올라간 다음, 다시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난 그 말이 굉장히 싫었다. 진짜 인생이 그런 거면, 살고 싶지 않았기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한창 자의식이 과잉했던 시절이라 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건 너무 맞는 말이다. 높은 곳에 있는 돌 덩어리는 아주 가벼운 손놀림에도 와르르 굴러간다. 중력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다. 돌 덩어리가 굴러 떨어지듯, 성취감은 쉽게 무너지고, 행복은 지속될 수 없기에 행복이다. 등산을 했으면, 꼭 하산을 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자. 어찌 되었든 인생은 정상이 아니라, 산 밑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