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난 화에서 송주환 CIO는 현업의 에이스들을 설득하며 AI COE(AI Center of Excellence)를 구성했습니다. 노희건 회장의 강력한 지원 아래 조직의 벽을 넘어섰지만,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내부 인력을 모았다 해도, 네메시스는 AI 도입이 처음이었습니다. 50년 제조업 경험은 풍부하지만, AI 프로젝트의 함정과 성공 요소에 대한 검증된 방법론은 부족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모르는 상태(Unknown Unknown)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송주환은 AI COE 팀원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AI 도입에는 분명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복잡한 이슈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재훈 IT팀장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Nemarket을 클라우드에 구축할 때도 그랬습니다. 단순한 B2B 마켓플레이스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시작하니 기존 ERP와의 실시간 연동에만 예상보다 3배 시간이 걸렸죠."
송주환은 바로 이 지점에서 16주 PI(Pre-Implementation) 컨설팅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본격적인 AI 도입에 앞서, 네메시스의 현재 상태를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검증된 방법론을 바탕으로 한 실행 로드맵이 필요했습니다.
송주환은 시장에서 AI 역량으로 평판을 얻고 있는 컨설팅사들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RFI/RFP라는 형식적 절차 대신, 각 컨설팅사를 직접 초대하여 네메시스가 안고 있는 어려움과 AI 도입의 큰 그림을 솔직하게 공유했습니다. 세 곳 모두 높은 관심을 보였고, AI COE는 이들에게 정식 제안요청서를 보냈습니다.
며칠 후, 송주환과 AI COE는 서로 다른 강점을 가진 3사의 최종 제안회를 차례로 진행했습니다. 이 만남은 오늘날 기업들이 AI 파트너를 찾을 때 마주하는 세 가지 전형적인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회의실 스크린에는 화려한 인포그래픽이 넘쳐났습니다. 200페이지가 넘는 제안서였습니다.
발표자는 해외 명문대 MBA 출신답게 유창한 프레젠테이션을 이어갔습니다.
AI 시장 규모, 글로벌 선도 기업 사례, 10년 후 예상 ROI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송주환의 날카로운 질문 앞에서는 무너졌습니다.
"인상적인 분석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이 모든 장밋빛 비전을 네메시스의 20년 된 MES 시스템과 어떻게 연결하실 건가요? 우리 생산 데이터는 아직도 상당 부분 엑셀로 관리하는데요."
컨설턴트의 표정이 굳어졌습니다. "그... 그 부분은 IT 현황 조사 후에..."
박성진 부장이 끼어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몇 년 후 이야기라는 거죠? 우리는 내일 당장 나오는 불량품부터 해결해야 하는데요."
이번에는 정반대였습니다.
화이트보드에는 CNN, LSTM 같은 복잡한 수식과 알고리즘 용어가 가득 찼습니다.
발표자는 "CNN과 LSTM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모델"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들의 기술적 깊이는 놀라웠습니다.
김태현 엔지니어는 눈을 반짝이며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박성진 생산부장의 표정은 어두웠습니다.
"기술은 훌륭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모델이 우리 원가 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려면 몇 달이나 걸릴까요?"
기술 전문가들은 서로 눈만 마주칠 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아... 그 부분은 비즈니스 팀과 협의해서..."
이수진 대리가 작게 중얼거렸습니다. "결국 우리가 다 알아서 하라는 소리네."
마지막 컨설팅사의 발표자료는 놀랍도록 간결했습니다.
단 세 장의 A4 용지. 거기에는 네메시스의 현황 분석과 AI 도입의 핵심 철학이 담겨 있었습니다.
"AI 도입의 성공은 모델의 정확도가 80%, 조직의 변화가 20%가 아닙니다."
컨설턴트가 잠시 멈춰 모든 참석자들을 바라봤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기술은 이미 충분히 발전했습니다. 진짜 전쟁은 현장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박 부장이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송주환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미팅이 끝난 후, AI COE 사무실에서는 작은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김태현 엔지니어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부티크가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저런 기술력이면 정말 대단한 걸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한준호 차장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기술은 좋지만 현실성이 떨어져. 우리가 원하는 건 논문이 아니라 실제 성과잖아."
박성진 부장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세 번째가 우리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 같네요. 현장에서 일해본 사람들인지, 우리가 뭘 고민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송주환은 이 토론을 지켜본 뒤 천천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이 변화를 이끌어갈 경험과 방법론입니다. 그리고..." 그는 박 부장을 바라봤습니다. "현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접근법이죠."
AI COE는 만장일치로 C사를 PI 컨설팅 파트너로 선정했습니다.
C사의 프로젝트 팀장 김상훈 이사는 20년간 제조업 디지털 전환을 도왔던 베테랑이었습니다.
첫 번째 킥오프 미팅에서 그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이번 PI의 목표는 완벽한 AI 전략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네메시스가 첫 번째 AI 프로젝트에서 반드시 성공할 수 있도록, 가장 승산 높은 과제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송주환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습니다. 우리에겐 실패할 여유가 없습니다."
C사가 합류한 2주 후, 본사 대회의실에서 전사 임원들이 참여하는 AI 전략 워크샵이 개최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AI COE와 C사의 컨설턴트들은 2주간 밤낮으로 각 본부의 현재 상황(As-Is)과 AI 도입에 따른 정성적·정량적 ROI를 정리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컨설팅사의 객관적인 시각으로 네메시스가 현재 가진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AI를 통해 무엇부터 해결할 수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워크샵의 분위기는 시작부터 팽팽했습니다.
송주환 CIO는 정중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포문을 열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의 목표는 'AI 기술 공부'가 아닙니다. 우리 회사의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가장 먼저 투입할 것인가, 생존을 위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곧이어 각 본부의 생존 논리가 적나라하게 충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성장, 기반, 안정이라는 세 가지 가치의 싸움이었습니다.
영업본부장이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치며 일어섰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매출입니다! 당장 1조 클럽이 눈앞인데, 언제까지 내부 효율만 따지고 있을 겁니까?"
그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습니다.
"CRM 데이터를 분석해 영업 리드 스코어링부터 합시다! 그래야 신규 시장을 뚫고 중국 업체들을 따돌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성장이냐 죽느냐의 기로입니다!"
R&D 센터장이 냉정한 목소리로 반박했습니다.
"영업본부장님 말씀은 좋습니다만, 현실을 보십시오." 그는 노트북을 열어 데이터 연동 현황을 보여줬습니다.
"지금 우리 CRM 데이터와 ERP 데이터도 제대로 연동이 안 되는데, 무슨 분석을 하겠다는 겁니까? 데이터 품질이 엉망인 상태에서 AI를 돌리면 쓰레기만 나옵니다. 데이터 통합 플랫폼 구축부터 최소 2년은 잡고 시작해야 합니다! 기초 공사 없이 빌딩을 올릴 수는 없습니다."
생산본부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었습니다.
"둘 다 중요한 이야기지만..."
그는 월간 원가 보고서를 펼쳐 보였습니다.
"지금 당장 가장 큰 비용 누수가 발생하는 곳이 어딘지 보십시오. 매년 약 47억 원이 불량품 때문에 공중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묻어났습니다.
"불량률을 겨우 1%만 줄여도, 그 돈으로 R&D도 하고 영업 지원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을 위한 첫걸음은 원가 절감과 품질 안정입니다."
"또 IT 쪽에서 돈만 쓰겠다는 거 아닙니까?" 영업본부장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습니다.
회의실에 차가운 정적이 흘렀습니다. 모두의 말이 옳았습니다.
매출도 중요하고, 데이터 기반도 중요하며, 원가 절감도 시급했습니다.
하지만 한정된 자원으로 모든 것을 동시에 할 수는 없었습니다.
워크샵이 끝난 후, AI COE 사무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습니다.
각 본부의 주장은 모두 일리가 있었습니다.
송주환은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CoE 멤버들과 함께 각 스탠스의 장단점을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김민준 과장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솔직히 우리 본부장님 말씀도 맞아요. 매출 성장 없이는 회사 자체가 위험하죠."
이수진 대리가 동의했습니다.
"맞아요. 하지만 R&D 센터장님 말씀도 무시할 수 없어요. 데이터가 엉망이면 아무리 좋은 AI 모델을 써도 소용없잖아요."
한준호 차장이 데이터 현황을 화이트보드에 그려가며 설명했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완벽한 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하려면 정말 2-3년은 걸려요. 그동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고..."
박 부장이 묵직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AI가 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요. 우리가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거죠."
몇 시간에 걸친 토론 끝에, 송주환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모두의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반드시 성공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성공은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명확하고 측정 가능한 숫자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는 화이트보드에 세 개의 열을 그었습니다.
"영업 리드 스코어링은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성공'의 기준이 모호해요. 영업 성과는 너무 많은 외부 변수에 영향을 받습니다. 6개월 후 매출이 늘었다고 해서 그게 AI 덕분이라고 누가 믿어줄까요? 실패할 경우, 'AI 그거 별거 아니네'라는 냉소만 남을 겁니다."
"데이터 플랫폼 구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2-3년간 눈에 보이는 성과 없이 투자만 해야 합니다. 그동안 경영진과 현업의 지지를 계속 받을 수 있을까요? 중간에 '돈만 먹는 하마' 소리 들으면서도 버틸 자신 있으신가요?"
송주환의 목소리에 확신이 실렸습니다.
"생산 라인 불량 예측은 다릅니다. 물론 생산 라인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50년간 쌓인 데이터를 정비하고 3개월 안에 구축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죠. 그래서 범위를 'A-7 모듈의 미세 균열 불량 예측'으로 한정하는 겁니다. 이 문제 하나만 해결해도, '월간 폐기 비용 약 4천만 원 절감'이라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명확하고 측정 가능한 ROI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는 화이트보드에 큰 원을 그리며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보세요.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A-7 모듈의 생산 데이터 통합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즉, '기반' 작업이 함께 이뤄지는 거죠. 그리고 절감된 비용은 향후 신제품 개발에 재투자할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이 됩니다. 즉, '성장'으로 가는 발판이 되는 거예요."
회의실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박 부장이 처음으로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성공하면, 다른 부서들도 자기 문제 해결해달라고 줄 서겠네요."
이수진 대리가 맞장구쳤습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전사 데이터 플랫폼도 필요해지고..."
김민준 과장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데이터로 영업 분석도 할 수 있게 되는 거네요!"
송주환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습니다. 결국 우리는 '안정'을 시작으로 '기반'을 다지고, 최종적으로 '성장'으로 나아가는, 가장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첫걸음을 내딛는 겁니다."
그날 밤, 사무실에 홀로 남은 송주환은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A-7 모듈 문제... 박 부장도 모르는 게 있을 거야. 이 데이터 속에 숨겨진 패턴을 찾아낸다면...'
그는 모니터에 띄워진 3년치 불량 데이터를 다시 한 번 들여다봤습니다.
수많은 숫자들 사이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규칙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네메시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의 진짜 시작이었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AI COE와 C사가 함께 네메시스의 민낯을 들여다보며, A-7 모듈 불량 데이터 속에 숨겨진 놀라운 패턴을 발견하는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