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ck Corea의 Akoustic Band

문든 떠오른 Chick Corea Akoustic Band

by Yameh

오늘 하루의 사운드트랙은 밥 제임스로 시작했다. 아침에 나는 밥 제임스의 ‘Touchdown’ 앨범을 틀었고, 그 앨범에 들어 있는 “Angela”를 들었다. 그 “Angela”. 1970년대 미국 TV 시트콤 “Taxi”의 테마로 쓰인, 뉴욕의 밤공기 같은 곡. 약간은 지쳐 있고 약간은 외롭고, 그래도 하루를 버텨내는 도시의 피로와 체온이 동시에 묻어 있는 그 멜로디. 그걸 먼저 들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유튜브로 넘어가서 밥 제임스 트리오 버전의 “Angela”를 다시 들었다. 같은 곡인데 트리오 편성으로 들으면 더 몸 가까이 붙는다. 부드럽고, 약간 쓸쓸하고, 낮은 조도의 뉴욕.

많은 사람들이 “Angela”를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정서랑 겹쳐 기억하곤 한다. 로버트 드 니로, 조디 포스터, 피곤한 새벽 도시.

실제로 “택시 드라이버”의 메인 테마는 버나드 허먼이고 “Angela”는 TV 시리즈 “Taxi”의 주제곡이지만, 그 둘이 공유하는 늦은 밤 뉴욕의 질감 — 불 꺼진 골목, 축 늘어진 어깨, 아직 안 끝난 하루 — 때문에 내 머릿속에서도 한 덩어리로 붙어 있다.

물론 뉴욕에 아직 가보지 않은 나로서는 그냥 내 머릿 속에서 만들어낸 상상의 이미지이다.


제임스는 지금도 내 일상에 늘 있다. 라일 메이즈도 마찬가지다. 이 두 명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손이 가는 피아니스트들이다. 라일 메이즈는 풍경이다. 시야를 확 열어주고 공기 압력을 바꿔준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분명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커튼을 한 겹 더 젖히고 바깥빛을 한 단계 더 들여오는 사람. 밥 제임스는 촉감이다. 살에 닿는 온도, 생활에 스며드는 리듬. 이 둘은 커피 마실 때나 노트 정리할 때, 혹은 그냥 앉아 있을 때도 저항 없이 틀 수 있는 음악이다. ‘오늘 하루의 배경음’ 역할을 한다. 어쩌면 '라운지 음악'인가? 하는 생각도 가끔 든다.


칙 코리아는 조금 달랐다. 칙 코리아는 오랫 동안 내 머리 속 서랍 안에 봉인돼 있었다. 예전엔 그렇게 나를 그렇게 뒤흔들던 때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는 게 바빠 약간은 소원해진 오래된 '베프'의 느낌이다. 그리고 그와의 재회가 오늘 오후에 일어났다.


아무 생각 없이 오후 산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Morning Sprite”가 떠올랐다.

그냥 떠오른 정도가 아니라, 그대로 재생됐다. 칙 코리아 아쿠스틱 밴드(Chick Corea Akoustic Band)의 그 “Morning Sprite”. 피아노가 톡 쏘듯 튀어오르고, 드럼은 등 뒤에서 “빨리 일어나야지” 하고 다그치고, 베이스는 아래에서 스프링처럼 몸을 밀어 올리는 그 탄력. 그게 뇌 안에서 갑자기 시작되는 순간 산책은 더 이상 산책이 아니고, 나는 그 곡 한가운데로 끌려갔다.


여기서 ‘스프라이트’라는 단어가 개인적으로는 그냥 제목이 아니었다. 지금 세대랑은 감각이 다를 수 있는데, 한국에서 스프라이트가 본격적으로 깔리기 시작한 게 대략 91년 말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전에는 한국에서 사이다 하면 칠성사이다였고, 코카콜라는 한국 시장에서 칠성사이다를 이길 수가 없었고 ‘킨 사이다’ 같은 걸로 한 번 붙어봤지만 잘 안 됐다. 결국 “그러면 우리 브랜드 원형으로 가자” 하고 스프라이트를 들고 들어왔다. 미국식 청량감, 더 직선으로 치고 올라오는 탄산, 그 이미지를 들고. 시장에서 칠성사이다를 무너뜨리진 못했지만, 분명히 “이건 좀 미국 같다”라는 감각은 있었다. 그때 우리한테 ‘미국 같다’는 건 곧 ‘조금 더 날카롭다’, ‘조금 더 직진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 당시는 미국을 가본 적이 없었던 때라 그럴 거라는 상상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걸 그대로 음악이랑 연결했다. 곡 이름이 ‘Morning Sprite’이니까, 진짜로 가끔 스프라이트를 사 와서 같이 마시면서 들었다. 컵에 따를 때 목을 치고 올라오는 탄산감이 곡의 첫 프레이즈와 바로 겹쳤다. “이건 한국식 사이다의 동글동글한 청량감이 아니고, 진짜 직선으로 깨우는 탄산이다”라는, 말도 안 되게 순진하고 말도 안 되게 정확한 연상. 그래서 지금도 “Morning Sprite” 하면 나는 자동으로 그 초록 병의 뚜껑 소리까지 같이 떠올린다. 음악 한 곡이 음료 하나와 결혼해 있던 시절이었다.


이 곡은 나에게 아침이었다. 새 학기가 막 시작하던 3월 아침 공기. 얇은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빨리, 이제 진짜 움직일 시간” 하고 등을 콕콕 찌르는 그 압박. 이건 다정한 기상 알람이 아니다. 거의 멱살 잡고 일으켜 세우는 빛같은 느낌이다. 그 빛을 못 이겨서 마지못해 상체를 세우고 기지개를 켤 때의 물리감 — 의식은 아직 반쯤 자고 있는데 근육부터 먼저 늘어나며 으으아- 하고 펴지는 그 순간.

“Morning Sprite”는 그 몸의 순간을 소리로 만든 것처럼 들린다. 귀로 듣는 게 아니라 척추로 듣는 음악이다. 첫 마디에서 스파크처럼 올라오는 그 탄산감은 아직도 내 기억 속 스프라이트 병뚜껑을 동시에 연다.


근데 이 앨범은 아침만 있는 게 아니다. 나한테는 밤도 있었다. 그 밤이 “Sophisticated Lady”다.


“Sophisticated Lady”는 본래 듀크 엘링턴의 곡이다. 그런데 칙 코리아 아쿠스틱 밴드가 이걸 건드리면, 그건 그냥 스탠더드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호흡 자체를 다시 짜는 작업처럼 들린다. 여기서는 속도가 확 내려앉는다. 조명이 낮아진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진다. 데이브 웨클은 거의 속삭이듯 브러시와 심벌로 숨을 깔고, 존 패티투시는 음 하나하나를 길게 붙들고 있다가 아주 천천히 내려놓는다. 칙 코리아는 멜로디를 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워준다. 그래서 그 순간 이 트리오는 ‘테크니컬 몬스터’가 아니라 ‘서늘하게 늦은 밤을 버티는 세 사람’이 된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늘 방 안 불을 거의 다 끄고 싶어진다. 이건 도시의 1시 반, 2시 반 같은 시간이다. 이미 하루는 끝났는데 아직 진짜로 끝내지 못하고 있는 시간. “Morning Sprite”가 나를 억지로 깨워서 바깥으로 내몬다면, “Sophisticated Lady”는 나를 안으로 다시 데려온다. 앉혀놓고, 조용히 숨 고르게 하고, “너 오늘 하루 살아남은 거 안다”라고 말해준다.

내 안의 긴장을 조금은 용서해주는 밤의 사운드가 바로 이 곡이었다. 같은 앨범 안에서 이런 밤이 있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한 장짜리 앨범인데 하루가 다 들어있다.


그리고 그다음이 “T.B.C.”다. 이건 그 시절의 나한텐 그냥 ‘to be continued’처럼 들렸다. “계속 간다, 아직 안 끝났다.” 실제로 곡의 에너지도 그런 식으로 들린다. 근데 제목의 실제 뜻이 ‘Terminal Baggage Claim’이라는 걸 알고 나면, 풍경이 더 선명해진다. 공항 도착 게이트, 새벽 공기, 비행기에서 막 내려온 밴드. 수하물 찾는 구역의 형광등은 피곤할 정도로 희고, 몸은 이미 부서졌는데 하루는 아직 안 끝났고, 시계는 이상하게 꼬여 있고, 정신은 내일로 넘어가 있는데 현실은 아직 오늘 안에 묶여 있는 그 순간. “T.B.C.”는 그 장면이다. 투어 중반부의 시간감. 도착했지만 아직 쉰 게 아니다. 오늘이 끝났다고 말할 수 없고 내일이 이미 시작돼버린 상태. 그래서 나한테 이 곡은 지금도 “내일도 계속”이라는 뜻으로 들리지만, 그 ‘계속’은 깔끔하게 넘기는 다음 회차 예고가 아니라, 수하물 벨트 앞에서 눈 비비며 비틀거리는 계속이다. 살아 있는 사람의 계속. 피곤한 사람의 계속.


결국 “Morning Sprite”가 오늘 아침을 강제로 열어주고, “Sophisticated Lady”가 오늘 밤을 정리해주고, “T.B.C.”가 “그 다음 날도 네가 원하든 말든 이미 시작됐다”라고 알려준다. 하루의 사이클이 이 세 곡 안에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앨범을 그냥 ‘좋은 트리오 앨범’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이건 하루 단위의 삶의 구조, 소모, 회복, 그리고 다음 날로의 강제 이월까지 들어 있는 어찌 보면 하나의 생활 지도책 같은 것이다.


나는 그 충격을 처음 맞은 게 1991년이었다. 당시에 나는 퓨전 음악에 기울어 있었다. 칙 코리아라는 이름은 나에게 전기(電氣)의 이미지였다. 그 뿌리는 두 갈래였다.


하나는 1970년대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 시절의 칙 코리아였다. 알 디 메올라와 함께 초고속 일렉트릭 기타 라인을 날리고, 라틴과 록의 에너지를 폭발시키던 칙. 그건 “재즈가 여기까지도 간다”라는 선언 자체였다. (그건 GRP가 아니다. 완전히 다른 시대, 다른 레이블, 다른 산업 구조다. 거의 다른 우주다.)
다른 하나는 1980년대 후반의 칙 코리아 일렉트릭 밴드(Chick Corea Elektric Band)였다. 신시사이저, 프렛리스 베이스, 반짝이는 전자 톤. “이게 80년대다”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운드. 이 둘이 내 안에서 겹치면서 칙 코리아는 “전압과 속도의 사람”이었다. 긴장과 반응의 사람. 나를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사람.


거기에 또 하나가 있었다. 이름. Corea.


그 시절 한국에서 재즈 듣는 입장에서는 “Corea”라는 철자 자체가 우리한테 신기한 신호였다.

그냥 Chick Korea처럼 들리잖아. “혹시 한국계야?” “한국이랑 무슨 인연이 있어?” 이런 얘기를 우리는 실제로 했다. 그때는 정보가 지금처럼 바로 손에 안 잡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소문은 거의 도시전설처럼 돌았다. “칠성사이다 vs 스프라이트”만큼이나, “Chick Corea는 혹시 한국 사람일 수도 있다”는 얘기는 우리 세대 음악 애호가들의 단골 농담이자 약간은 진담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건, 칙 코리아의 본명은 아르만도 앤서니 코리아(Armando Anthony Corea)고 미국 매사추세츠주 첼시에서 자랐고, 혈통은 남부 이탈리아 계열이라는 것. 아버지 쪽은 칼라브리아, 어머니 쪽은 시칠리아 계통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니까 Corea는 Korea가 아니라 남부 유럽 성씨였나보다. 그런데도 우리한텐 그 철자 자체가 이상하게 정서적으로 붙어 있었다. “세계 최강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의 성이 우리나라 이름과 같은 발음을 한다” — 이건 그냥 재미있는 우연이 아니라, 약간은 자랑처럼 느껴졌다. 그게 칙 코리아를 더 신화로 만들었다. 그는 우리의 사람이 아니면서 동시에 약간은 우리의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이렇게 믿었다. 알 디 메올라가 없는 칙 코리아는, 조금 힘이 덜할지도 모른다. 신시사이저 없이 그냥 피아노 앞에 앉은 칙 코리아는, 약간 점잖고 안전해질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꽤 순진한 확신이었지만, 그땐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확신을 박살낸 게 칙 코리아 아쿠스틱 밴드의 스튜디오 앨범이었다.


이건 1989년 즈음 칙 코리아가 존 패티투시(베이스)와 데이브 웨클(드럼)과 함께 완전히 어쿠스틱 트리오로 발표한 작업이다. 이 시기의 칙 코리아는 GRP 레이블 아래 있었다. GRP라고 하면 나는 늘 데이브 그루신, 리 릿나우어 그리고 (나한테는) 밥 제임스 계열로 이어지는 세련된 컨템포러리 재즈/퓨전의 하이파이 사운드, 도시적으로 잘 다듬어진 톤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 당시 내 반응은 거의 이런 식이었다. “일렉트릭 밴드가 GRP에서 나오는 건 알겠어. 근데 이런 직격의 어쿠스틱 트리오까지 GRP에서 나온다고? 그건 GRP와 어울리지 않는 옷 아니야?”


그건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 칙 코리아의 위상 자체가 그 자리에서 다시 쓰였다. 이 앨범을 들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아, 알 디 메올라가 없어도 되네.” “신시사이저가 없어도 되네.” “전기 장비 없이도 이 사람은 똑같이 — 아니 더 직접적으로 — 밴드를 지휘하네.” 피아노 하나만으로도 칙 코리아는 여전히 칙 코리아였다. 아니, 오히려 더 칙 코리아였다. 억지로 ‘재해석해보자’ 하는 식의 증명이 아니라 너무 당연하게 들리는 사실이었다. 1991년의 나는 그걸 듣고 진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쿠스틱 트리오도 이렇게까지 뜨겁고, 이렇게까지 공격적이고, 이렇게까지 살아있을 수 있구나.” “퓨전만이 에너지의 전부가 아니었구나.”


그리고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게 하나 있다. 그 당시 잡지(재즈 잡지, 악기 잡지, 뮤지션 인터뷰 잡지)를 떠올려보면, 이 세 명 중에서 제일 깊고 진지하게 다뤄졌던 사람은 의외로 칙 코리아도 아니고 데이브 웨클도 아니고, 존 패티투시였다. 왜 그랬을까?


당시 기준으로 칙 코리아는 이미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잡지가 그를 다룰 때는 “위대한 리더”가 아니라 거의 “이건 더 설명 안 해도 알지?” 같은 톤이었던 것 같다. 데이브 웨클도 이미 하이퍼 정확도와 테크닉으로 ‘드럼 히어로’ 브랜드가 붙어 있었고, 드러머들 사이에서 독립적인 신화처럼 소비됐다. 그런데 존 패티투시는 달랐다. 그는 비교적 젊었다. 콘트라베이스(어쿠스틱)와 일렉트릭 베이스 둘 다를 말도 안 되게 치면서, 전통 재즈 구문과 퓨전 언어를 동시에 자기 걸로 돌리고 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차세대”가 아니라 “다음 포맷” 그 자체로 소개됐다. 그리고 GRP 입장에서도 존 패티투시는 정말 밀 수 있는 얼굴이었다. “이건 그냥 백업 베이시스트가 아니다. 이 사람은 밴드를 앞으로 끌고 간다.” 그러니까 기사들이 존 패티투시를 다룰 때는 단순히 ‘연주 잘하는 베이시스트’가 아니라 “재즈 베이스의 다음 단계”, “리듬 섹션이 리드 파트가 되는 미래형” 같은 식으로 썼다. 말하자면, 그는 미래였다. 잡지는 늘 미래를 판다. 그래서 존 패티투시에 그렇게 많은 지면과 찬사가 몰렸던 것 같다.


그 얘기까지 떠올리면 이 앨범이 왜 교과서인지가 더 분명해진다. 그냥 명반이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거의 커리큘럼에 가깝다. 한 멜로디, 한 소절이 전부 살아 있다. 칙 코리아는 짧은 프레이즈를 툭 던지고, 즉석에서 비틀고, 리듬을 어긋나게 하고, 다시 변주한다. 눈앞에서 즉흥 작문 수업을 여는 교수 같다. 존 패티투시의 베이스는 단순히 루트를 깔아주는 반주가 아니다. 그는 다음 장면을 미리 예고하는 공저자다. “여기서 올린다, 여기서 눌러준다, 여기서 바닥 다진다”를 음으로 말한다. 데이브 웨클은 드러머라기보다 편집자 겸 감독이다. 언제 긴장을 조일지, 언제 갑자기 천장을 열어 환기시킬지, 언제 “여기가 클라이맥스야”라고 못을 박을지. 그는 드럼으로 밴드를 지휘한다. 피아노 트리오인데 프런트맨이 셋이다. 세 명이 다 리더다. 학생 입장에서는 “트리오가 어떻게 서로를 실시간으로 재구성하는가”를 그냥 귀로 배울 수 있는 음반이다. 그래서 이건 재즈 학생들이 꼭 거쳐야 하는 교재 같은 앨범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론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Autumn Leaves”까지 가면 또 다른 연결이 튀어 오른다. 거기서 나는 늘 팻 메시니 트리오와 안토니오 산체스를 떠올린다. 공통점은 분명하다. “드러머는 반주자가 아니다.” 데이브 웨클은 단순히 박자를 지키지 않는다. 그는 장면 전환을 설계하고, 다음 감정의 색을 먼저 깔아준다. 안토니오 산체스도 팻 메시니와 할 때 똑같다. 드럼으로 밴드의 다음 표정을 열어버린다. 산체스가 후배 세대로서 데이브 웨클, 비니 콜라이우타 같은 80~90년대 고해상도 드러머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고 말해온 걸 떠올리면, 그 계보는 그냥 말이 아니라 귀로 확인된다. 웨클에서 산체스로, 칙 코리아의 트리오에서 팻 메니의 트리오로, “드러머가 밴드의 운전대를 잡는다”는 개념은 명확히 이어진다.


물론 둘은 똑같지 않다. 칙 코리아와 팻 메시니는 표면적으로는 닮았다. 둘 다 트리오 안에서 세 명이 동시에 운전한다. 베이스와 드럼이 뒤에 숨지 않는다. 하지만 멜로디 전개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칙 코리아는 짧은 아이디어 조각을 고속으로 던지고, 비틀고, 변주하면서 에너지를 점프식으로 끌어올린다. 음악이 체스 같다. 순간 가속이다. 팻 메시니는 한 줄의 멜로디를 길게 끌고 가며 감정을 누적시킨다. 음악이 장거리 도로 여행 같다. 같은 “셋이 운전”이라도 운전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여기까지가 귀로 들은 이야기라면, 이제 몸으로 남은 이야기.


지금은 칙 코리아도, 라일 메이즈도 우리 곁을 떠났다. 둘 다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됐다. “언젠가 라이브로 또 보지”라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정말로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사람들이 됐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다시 음악을 틀면 감정선이 예전하고 다르게 올라온다. 가끔은 짜릿하고, 가끔은 서늘하다. 오늘 “Morning Sprite”를 다시 들으면서 내가 동시에 든 생각이 그거다. 아, 이건 이제 다시는 눈앞에서 재현될 수 없는 인간의 호흡이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들 중 두 사람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 밥 제임스와 라일 메이즈. 그것도 미국이 아니라 한국, 역삼동에서. 같은 공간의 공기를 같이 마신 적이 있다. 그냥 객석에서 쳐다본 정도가 아니다. 정말로 손을 맞잡았다. 악수를 했고, 사인을 받았다. 그건 “레코드 재킷 속 인물”이 내 손 안으로 튀어나온 경험이었다. 그 순간 이후로 그들의 연주는 나한테 ‘유명한 음악’이 아니라 ‘내가 손을 잡은 사람의 몸에서 나온 소리’가 됐다. 그건 스트리밍으로 복제할 수 없는 감각이다.


칙 코리아는 내 앞에 실제로 선 적은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오히려 더 신화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은 반대가 됐다. 이제는 그 신화적인 사람이 정말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음악을 더 직접적으로 만든다. 오늘 오후의 “Morning Sprite”는 단순히 “좋은 곡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아니었다. 그건 “내 몸이 기억하는 시대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신호였다. 오래된 전압이 다시 켜지는 순간. 손이 떨리진 않지만 안쪽이 뜨거워지는 순간. 그리고, 이상하게, 허기가 도는 순간.


여기서 나는 한 발 더 나간다.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게 된다. 오늘 이걸 들으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직후, 그 공백 위에 칙 코리아, 라일 메이즈, 밥 제임스 같은 사람들이 갑자기 등장했다면, 서양 음악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생각해보면 이 셋은 단순히 “연주 잘하는 재즈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 칙 코리아는 즉흥을 작곡 수준으로 조직하고, 그 자리에서 앙상블 전체의 구조를 설계한다.
– 라일 메이즈는 하모니와 공간과 서사를 하나의 풍경으로 묶어 버린다. (그 사람은 화성만 쌓은 게 아니라 기후를 만들었다.)
– 밥 제임스는 리듬과 터치를 생활의 언어로 번역한다. “어제의 도시 감각”을 바로 음으로 기록한다.
이건 그냥 플레이어가 아니라 언어를 만든 사람들이다. 만약 이런 언어가 19세기 초반의 유럽에 떨어졌다면, “이게 클래식이고 저게 재즈”라는 구분 자체가 애초에 다른 식으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콘체르토 대신 즉흥 트리오 인터플레이가 정전(正典)이 되고, 실내악이 지금 우리가 부르는 ‘리듬 섹션’ 감각을 품었을 수도 있다. 악보로만 남는 음악이 아니라, 즉흥의 상호작용 자체가 작곡으로 인정받는 역사가 더 빨리 왔을 수도 있다. 완전히 허황된 상상인데, 듣다 보면 진짜로 그렇게 느껴진다. 이건 그 정도 급의 창조력이다.


그 생각까지 하고 나니까 더 배가 고파진다. 살아 있는 몸은 배가 고프다. 그래서 나는 이걸 들으면서 오늘 저녁 메뉴까지 정했다. 탕수육, 짬뽕, 이과두주. 달콤하고 바삭한 것, 국물로 밀어붙이는 매운 것, 목을 훅 열어주는 술. 나만의 트리오다.


칙 코리아, 존 패티투시, 데이브 웨클.
탕수육, 짬뽕, 이과두주.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르고, 셋이 동시에 있어야 완성된다. 한 명만 빠지면 맛이 안 난다. 이건 농담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금 내 몸 상태 보고서다. 1991년에 나는 이 앨범을 처음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쿠스틱 트리오도 이렇게까지 살아있을 수 있구나.” 그건 그때 내 귀를 바꿨고, 오늘 오후 내 몸을 다시 깨웠다.


좋은 음악은 플랫폼에서 빠질 수 있다. 레이블은 바뀌고 권리는 묶이고 국가는 막히기도 한다. 사람은 세상을 떠난다. 다시 볼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내 몸에 남은 반응은 지워지지 않는다. 아침엔 밥 제임스의 “Angela”가 나를 부드럽게 풀어줬고, 오후엔 칙 코리아의 “Morning Sprite”가 나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밤에는 “Sophisticated Lady”가 나를 가라앉혀서 숨을 정리해주고, “T.B.C.”는 수하물 벨트 앞에 멍한 눈으로 선 채 이미 내일에 발을 디딘 나를 비춘다. 나는 역삼동에서 밥 제임스와 라일 메이즈의 손을 실제로 잡았고, 악수를 했고, 사인을 받았다. 그건 내 시간대의 사건이다. 칙 코리아는 내 눈앞에 선 적은 없지만, 내 신경계에는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있다. 아주 오래된 전압은, 아직도 가끔 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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