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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선 Apr 02. 2020

당신에게 지금 부족한 것

휴직을 하고 코딩을 시작하다

 회사 선배가 식사 중에 그런 말을 했다. 자기 친구가 결혼하기 전에는 분명 등산을 극혐했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더니 갑자기 그렇게 산에 오르고 싶더란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거 성취감이 필요해서 그래요. 성취감을 느껴본 적이 너무 오래됐거든. 정상을 한번 내 발로 찍고 오면 성취감이 뿜뿜할 것 같은 거지."

 우스개 소리로 한 말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성취감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대입할 수 있다.

 가장 먼저 성취감에 매료되는 건 아이들이다. 제 살기 바쁜 삼촌으로서 오랜만에 만난 조카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아가가 할 거야."

 조그마한 놈이 3인칭까지 써가며 아직 어려서 못할 것 같은데도 자신이 하겠다고 떼를 쓴다. 그걸 눈치 못 채고 어른이 해버리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세상이 뒤집힌다. 첫째 조카가 그럴 때만 해도 개인의 성격 탓인 줄 알았는데 뒤이어 태어나는 조카들 모두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을 보니 인간 진화의 한 과정인 듯싶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관문 열기, 물 잔에 물 따르기 등이 그들에게는 성취감의 주요 먹거리이다. 곧 태어날 아들 녀석이 회사 출퇴근 하기, 엄마 잔소리 듣기, 예비군 훈련 참석하기 같은 것들을 대신해주겠다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본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사회가 정해놓은 목표들을 하나씩 클리어하며 자라난다. 첫 입학, 수능, 군입대, 졸업, 취업 등 컨베이어벨트에 올라탄 것처럼 가만히 있기만 해도 다음 스테이지가 펼쳐진다. 걔 중에는 벨트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거나, 뛰어내리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까지 사회에서는 소수로 취급된다. 그리고 그런 관문들을 지나칠 때마다 우리는 더부룩한 성취감을 맛본다. 마치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남기지 않고 다 먹었을 때 잘했다고 칭찬을 듣는 것처럼.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사회가 정해놓은 기본 성취 코스 같은 것은 더 이상 없다. 취직 후 사람들이 쉽게 무기력에 빠지는 것은 더 이상 성취감을 느낄 재료가 없기 때문이다. 어제 갔던 회사를 오늘 또 가서 내일도 할 일을 오늘 하는 생활의 반복 속에서 도무지 성취감이라는 것을 느끼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취미라는 것을 찾는다. 낚시, 요리, 게임... 또 누군가에겐 그것이 연애가 될 수도 있다.

 "언제부터 꿈을 얘기하지 않게 되었을까?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라는 것을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게 하며,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뭐 그런 것이다."

 - 드라마 '연애시대' 중

 내가 9년째 독서토론 모임에 나가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적어도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어냈다는 성취감을 준다. 동시에 회사 일이 아닌 다른 무엇을 위해 시간을 들이고 공을 들이면서 나는 회사의 부속품이 아닌 지성인으로서의 삶을 보장받는다. 가끔 점심시간에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사람들이 "대단하다", "멋있다" 한 마디씩 건네는 말에 취할 때도 있지만,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가장 크다. 

♧ 경인지역 독서토론 모임 [독한 녀석들]

 코로나19로 독서토론 모임도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했다. 창립 9년 만에 처음 모임을 취소했다. 다음 모임을 기약할 수 없기에 나는 다른 성취감의 재물이 급히 필요했고, 때 맞춰(?) 회사에서 세 번째 휴직 통보가 왔다. 앞서 첫 번째 휴직엔 아버지와 등산을 했고 (작년 가을), 두 번째 휴직엔 주식 투자 책을 한 권 뗐던 나는 어제 태어나 처음으로 코딩 공부를 시작했다. 분유 값이라도 벌게 인형 눈알이라도 붙일까 했지만, 도대체 몇 개의 눈알을 붙여야 성취감이 생길지 알 수 없어 코딩 책 한 권을 떼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아직 재미를 붙이지는 못했는데 적어도 책을 편 시간만큼은 코로나 관련 뉴스를 찾아보지 않게 되어 정신 건강에는 분명 도움이 된다.


 임신한 아내가 고심 끝에 대학원 첫 등록금을 납부한 것도 성취감이 작용했으리라 본다. (아내는 매번 내 글을 정독한다.) 물론 남편으로서 만삭의 아내가 힘들게 회사와 학교를 오갈 일이 무척 걱정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회사 때문에 안되고, 아이 때문에 안되고, 돈 때문에 안되고, 안될 이유는 무한수열처럼 늘어나기 마련이다. 아내가 아이를 낳은 후에도 무너지지 않을 성취감의 탑을 쌓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니 말릴 명분이 없었다. 한 학기라도, 한 달이라도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아내가 나처럼 요리에서 성취감을 맛보기란 이번 생에선 틀린 것 같고.


 무엇보다 나이가 든다고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다. 어른들을 보면 그렇다. 올해로 일흔에 한 해 더 가까워진 부모님의 인생 목표는 세계여행이었다. 사는 동안 모든 대륙을 밟아보겠다며 은퇴 후 쉼 없이 떠나던 두 분은 요새 집과 텃밭만을 오가며 농사라는 또 다른 목표에 집중하고 있다. 매번 산돼지에게 상납하면서도 때 맞춰 풀을 뽑고, 물을 주고, 비료를 주신다. 부모님이 가끔 사진을 찍어 보내주실 때면, 나는 열매마다 알알이 들어찰 두 분의 성취감이 무척 부럽다.


 의식하진 못했지만 우리는 날 때부터 저마다 성취감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 누군가 정해놓은 목표를 해 고군분투하기도 하고, 소소하지만 확실한 목표를 직접 세우기도 한다. 그 목표가 무엇이든 간에 성취감 비타민만큼 우리 삶을 건강하게 한다. 그리고 지금의 이 역경을 견뎌내고 진정한 봄을 맞고 나면 우리는 또 한 번 성취감을 맛볼 것이다. 살아냈다는 것,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분명 그 이후를 살아갈 이유가 되는 날이 반드시 오리라 오늘도 믿어 본다.




이 글을 다 씀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야호"를 외친 것을 보니 글을 쓰는 것 역시 성취감 때문이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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