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일의 기적을 믿나요?

[108일] 백일에 즈음하여

by 제이선

백일을 치렀다. 아침 일찍 차를 몰고 빌라촌 사이에 있는 작은 떡 카페에서 백일떡을 찾아왔다. 색색깔 송편에 백설기 그리고 수수떡까지 아기자기한 포장지에 담겨 나왔다. 그동안 아내는 식탁 위를 정리하고, 대여한 백일상 소품과 고향에서 '모셔' 온 샤인머스캣(한 송이당 1만 원이 넘는다는!)도 한 송이 올렸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예쁘게 꾸며졌다.


단 하나, 오늘의 주인공만 빼고.


아이는 한복을 입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품에 안아 억지로 달랜 후 점보 의자에 앉혔더니 아직 고개를 못 이겨 이리저리 꺾이고, 사진엔 공허한 그의 눈만 담겼다. 아이의 관심을 유도하려 카메라를 들고 애니멀 사운드도 내보고 장난감도 흔들어 댔다.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와이셔츠를 입은 내 등에서 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10월에 에어컨을 틀었다. 백일, 돌 사진 한번 찍는데 사진작가들이 몇 십만 원이나 받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한참을 울더니 이제는 또 꾸벅꾸벅 존다. 아이가 깨길 기다렸다가 겨우겨우 몇 장 더 찍었다. 그러나 결국 웃는 모습은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가족사진엔 당황해서 땀이 번들번들한 이마에 볼 빨간 아빠와 육아 노동으로 피폐해진 엄마 그리고 울부짖는 아들이 찍혔다. 인생이 더 이상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으리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 백일이었다.


백일 며칠 전에는 처음으로 아이를 데리고 고향에 다녀왔다. 추석 때도 못 뵈어 죄송한 마음에 평일을 끼고 큰 맘먹고 장거리를 달렸다. 편도 3시간이 걸리는 나의 고향. 손주가 태어난 지 100일이 다 되도록 손 한번 못 잡아본 부모님과 할머니를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아이는 내려가는 중에 수유 한 번과 배설 한 번을 했다. 갈수록 부모로서의 경험치가 느는 것 같다. 어렵사리 집에 도착했지만 슬픈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다. 본가에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집이 떠나갈 듯 울기 시작했다. 한 마리 승냥이처럼 울어 대는 아이를 보고 곧 칠십을 바라보는 엄마는

"왜! 어쩌라고! 야가 와 이카나!"


만 반복하셨다. 급하게 아이를 안고 이리저리 흔들어 봤지만 이미 데프콘 1에 이르고 있었다. 아이가 우는 것보다 엄마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게 더 화가 났다. 세 남매를 기른 엄마는 이미 힘들었던 기억을 잊고 순진한 할머니가 되었다. 엄마의 상냥함과 아빠의 윽박지름에도 아이는 그칠 줄 몰랐다. 결국 히든카드를 꺼냈다. 주차장으로 뛰어가 차 안에 있던 바람 빠진 짐볼을 들고 왔다. 울부짖는 아이를 아기띠에 매고 에어펌프를 들었다. 펌프질을 한 500번쯤 했을까? 짐볼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나는 사우나에서 갓 나온 것 마냥 땀범벅이 되었다. 그래도 덕분에 아이는 잠이 들었다.


다음 날도 순탄하지 않았다. 엄마와 할머니는 애를 너무 막 대한다, 너무 춥게 키운다 등 훈수 공격을 쉴 틈 없이 퍼부으셨다. 왜 필수 교육 과정에는 육아가 빠져 있어 이렇게 논쟁거리를 만드는지 모르겠다. 전 국민이 공유할 수 있는 육아 상식이 자리 잡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내와 나는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처가나 본가에서 하룻밤 잘 때면 새벽에 눈을 떴다가 주온과 피에타를 넘나드는 아내의 실루엣에 흠칫하곤 한다

얼마 전에는 아내와 사자후를 내뿜으며 다퉜다. 아내는 폭포처럼 눈물을 흘렸고, 잠들 때까지도 그런 아내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다음 날 쇼핑몰에 갔다. 아들을 데리고 쇼핑몰에 간 건 처음이다. 아니 병원과 가정집 말고 실내를 데려가는 것 자체가 처음이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쇼핑몰은 젊은 부모를 위한 서비스가 잘 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난생처음 유모차를 빌렸다. 수없이 쇼핑몰에 가봤지만 유모차를 빌려준다는 걸 이번에야 알았다. 아직 유모차를 사기 전이라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아들은 유모차를 꽤 좋아했다. (뭐든지 타는 걸 좋아하는 듯) 유모차를 타고 쇼핑몰 안을 이리저리 다니다가 야외 정원도 가고, 유아 휴게실도 들렀다. 휴게실에서는 젊은 엄마가 아기 이유식을 먹이고 있었고, 우리는 집에서보다 더 편하게 아이 기저귀를 갈았다. 아이를 데리고 쇼핑몰을 누비는데 전혀 번거롭거나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아 이래서 부모들이 쇼핑몰을 그렇게들 가는구나' 싶었다.


사실 이 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난생처음 쇼핑몰에 입장한 아들이 아니라 의외로 아내였다. 푸드코트에서 쌀국수를 한 그릇 시킨 아내는 이미 면발을 입에 넣기도 전부터 입이 귀에 걸렸다. 포장 용기에 담긴 불어 터진 면발이 아니라 이제 갓 나온 쌀국수를 만나서 행복한가 보다 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아들을 놔두고 우리끼리 먹는 밥이었다면 미안함과 걱정으로 밥이 안 넘어갔을 테다. 그렇다고 아들이 옆에서 늘 그렇듯 찡찡대고 보챘다면 애 달래느라 밥은 뒷전이었을 것이고. 다행히 바로 옆 유모차에서 아들은 쇼핑몰의 백색소음에 압도되어 눈만 껌벅이고 있었고, 우리는 모처럼 평화로운 식사를 했다. 아내는 그것만으로도 감격한 듯 보였다.


밥을 다 먹고 아동복 코너에 간 아내는 마치 놀이동산 마냥 설레서 뛰어다녔다. 본인이 입을 옷도 아닌데 저렇게 좋을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찡했다. 자기밖에 모르던 여자 친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이밖에 모르는 엄마가 남았다.

우리집 안방보다 좋은 듯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것들이 새롭다. 백일도 처음이고, 장거리 일정도 처음이고, 쇼핑몰 외출도 처음이다. 아이는 백일의 기적처럼 처음으로 통잠을 잤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러는 동안 아내와 나도 비록 힘겹긴 했지만 울고 웃고 또 행복했다. 어느새 태어날 때보다 무게도 길이도 두 배는 자란 아이가 못내 아쉽지만 그래도 아이와 함께할 새로운 일들이 아직은 많이 남았다는 사실에 자뭇 안심이 된다. 육아 선배가 말하길 애를 키우는 매일매일이 새로운 퀘스트라고 하더니, 다음 퀘스트는 또 무엇일지 기대 반 걱정 반이다. 물론 통잠은 반가운 일이지만 어쩌면 백일의 기적은 우리 세 가족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새로운 일상을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