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도시락 한편엔 늘 우엉과 연근조림이 들어 있었다. 너무 자주 담다 보니 반찬통이 검게 물들 정도였다. 사춘기 소년에게 점심시간은 너무나 가혹했다. 분홍 소시지와 달걀말이들이 가득한 교실에서 조림 특유의 짠내가 스멀스멀 나는 도시락을 열기란 쉽지 않았다. 요리에 관심 없는 워킹맘 엄마를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열 번에 한 번 만이라도 남들처럼 분홍 소시지를 먹는 게 소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학교가 전면 급식으로 바뀔 때까지도 나는 분홍 소시지를 보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타향살이 10년을 넘기고 자취 밥이 지겨워질 즈음 문득 엄마의 반찬들이 그리워졌다. 철들고 보니 아들이 좋아할 음식보다 아들에게 도움이 될 음식을 해주셨을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감성에 취해 전화를 걸어 엄마에게 그때 그 반찬들이 그립다고 말했다. 내가 기대한 건 그까짓 반찬 언제든 해줄 테니 내려오라거나 지금 당장 부쳐줄까 하는 살가운 말들이었다.
그러나 당황스럽게도 엄마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반찬뿐만 아니라 내가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는 사실조차 그녀는 몰랐다. 나에겐 학창 시절 가장 진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엄마의 반찬이 정작 엄마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지 않다니. 배신감과 아쉬움을 넘어 허무함까지 들었다. 사실 엄마는 그 외에도 나를 낳고 키우며 일어난 대부분의 것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자식 셋을 키우면 다 그렇게 된다는데 나는 그 잃어버린 시간들이 너무 아까웠다. 왜 엄마는 매일 우엉/연근조림을 싸줬을까? 아들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한 번도 분홍 소시지를 싸주지 않았을까? 영원히 풀지 못할 미스터리를 안고 사는 기분이다.
내가 아빠가 되었음을 알게 된 날, 퍼뜩 엄마의 반찬이 생각났다. 지금 느끼는 두려움과 황홀함의 앙상블을 언젠가 잊게 된다니!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어차피 잃을 기억이라면 어딘가에 남겨두자. 그렇게 나의 글은 타임캡슐을 땅에 묻듯 시작됐다. 앞날을 전혀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