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치의 리듬, 낭독 편
90년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한국계 배우 릭윤이 스콧 힉스 감독의 '삼나무에 눈이 내리면'이라는 작품에 출연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한국계 배우의 할리우드 진출도 흥미로웠지만, 스콧 힉스 감독에 관심이 더 갔다. 천재 피아니스트 핼프 갓( David Helfgott), 정신병으로 인해 20여 년간의 세월을 세상과 동떨어져 지내던 그가 재기 리사이틀 공연을 한다는 광고를 접한 스콧 힉스(Scott Hicks) 감독은 아내의 생일파티도 뒤로하고 데이비드 핼프갓의 공연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샤인(Shine)'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요즘은 111년 만에 찾아온 폭염으로 연일 무더위가 지속되고 있지만, 20대 어느 가을 한복판 점심시간에 우연히 꺼내 든 영화 DVD 타이틀 하나가 잠시 나를 화면 안에 잡아 놓았다. 피아노 선율이 온몸에 흐르고, 이어 박수 소리와 함께 많은 사람들은 데이비드 핼프갓의 재기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아마 그 관중 어딘가에서 스콧 힉스(Scott Hicks) 감독도 함께 일어나 박수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샤인이라는 영화는 말과 글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수상 내역만으로도 충분히 그 작품성을 대변할 수 있을 것이다. 호주 아카데미에서 후보에 오른 11개 부문이 전부 수상을 했고, 골든 글로브에서 5개 부문, 아카데미에서는 작품, 감독, 각본, 음악상, 그리고 남우주연상 등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Nominate) 되었다. 물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만 수상한 것은 조금 의외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직도 인상에 남는 영화 '샤인' 속 한 장면이 있다.
가을로 보이는 저녁, 비쩍 마른 곱슬머리의 한 사내가 바바리코트에 절반쯤 피운 담배를 입에 문 채 한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구석에 놓인 피아노를 찾아 앉는 그에게 조롱 섞인 웅성임이 들리고, 카페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종업원에게 밖으로 내쫓으라는 신호를 보낸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는데요'라고 말하려는 듯 종업원이 몸을 굽혀 말하려는 순간 핼프갓의 연기를 맡은 제프리 러쉬의 손이 건반 위를 빠르게 흐른다. '왕벌의 비행'으로 알려진 림스키 코르사코프(Rimsky-Korsakov)가 작곡하고, 라흐마니노프(Sergei V.Rakhmaninov)가 편곡을 한 <The flight of the Bulble-Bee>다.
바로 그 장면 하나로 34살이었던 나는 여의도 MBC 본사 앞 상가 2층에 위치한 허름한 피아노 학원을 찾아 '도레미'의 운지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목표였던 '왕벌의 비행'은 칠 줄 모르지만, 덕분에 집에서 가벼운 곡들을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하지만, 연습의 양이 부족하고, 시간이 흐르니 이제는 손이 조금씩 삐걱거리고, 곡의 흐름을 자주 놓치게 되면서 처음 피아노에 손을 얹으며 느꼈던 그 어색함을 다시 경험하고 있다.
언어의 사용 중 '낭독'이라는 부분은 피아노를 익히는 것과 무척 흡사하다. 결국은 흐름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흐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도레미'로 시작하는 건반을 알아야 하고, 양손이 큰 음자리와 작은 음자리에서 각자 역할을 해야 하며, 건반을 자연스러우면서 적당한 강도를 유지하며 누를 수 있는 숙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아노에서는 '하농'을 통해 손가락의 근육을 발달시키고 손가락에 악보를 건반에 전달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 '낭독'도 마찬가지다. 피아노에서 '화음감'을 기르기 위해 '하농'을 연습하듯 '낭독'에서도 '리듬감'을 기르기 위해 그만한 연습법이 필요하다. 물론 '낭독'의 악보는 연설문과 같은 대본이기 때문에 대본을 보는 법도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피아노를 배우며 쇼팽, 모차르트, 베토벤에 대해서는 많이들 알지만, '하농'은 단순히 교육과정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하농(Charles Louis Hanon) 역시 프랑스인으로 피아노 교사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던 음악가이다. 그가 교육을 하며 피아노의 화음감을 기르기 위해 쓴 '명피아니스트가 되는 60 연습곡'이 우리가 연습하는 '하농'으로 여기에는 4가지의 연습법이 존재한다.
첫째는 레가토(Legato)로 음악에서 계속되는 음과 음 사이를 끊지 않도록 원활하게 연주하는 것으로 손가락이 맞물리는 느낌으로 연주한다. 두 번째는 스타카토(Staccato)로 음표를 짧게 연주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다. 이때 팔의 힘을 풀고 손가락의 힘으로만 튕기듯 연주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악센트(Accent)인데, 어떤 음을 다른 음보다 강하게 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점과 역붓점이 있는데, 붓점은 앞음을 길게 뒤음을 짭게 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고, 엿붓점은 앞음을 짧게 뒤 음을 길게 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하농의 목적과 연습법이 낭독의 그것과 무척 닮아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는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글은 문장의 논리적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언어학자마다 의견은 조금씩 다르지만, 통상적으로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구성하는 단어들의 집합' 정도로 정의 내려 볼 수 있다. 이를 음성의 영역으로 가져와 보면, 이러한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음독(音讀)으로 표현하고, '문학작품 등을 낭랑한 소리로 그 글의 이미지나 정서를 표현해 남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낭독(朗讀)'이라고 한다. 영어권에서는 이 둘에 특별한 구분을 두지 않고 'Oral Reading'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결국 '낭독'도 전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낭독을 위한 전달의 방향을 피아노 연습에 맞춰 설명해보면, '리듬감'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낭독의 리듬감을 얻기 위해서 평소 책이나 신문 등을 읽을 때 사용하는 방법으로 일종의 '낭독의 하농 연습법'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2005년으로 기억하고 있다. MBC 아나운서국에서는 일본 유학을 다녀왔던 하지은 선배의 조언으로 후지 TV에서 매년 정례화한 시낭송회를 모티프(motif)로 '낭독(송)' 무대를 준비했다. 시를 읆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간단한 동화를 재해석해 낭독 형태의 연기를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자신이 좋아하는 책의 한 구절을 읽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리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았던 기획이 예상을 뛰어넘는 관중으로 준비했던 홍대 인근의 작은 공연장이 가득 찼고, 이듬해부터는 조금 더 큰 규모로 열리기 시작했다. 물론 아나운서 특유의 음색과 낭독에 곁들인 음악들, 거기에 무대라는 분위기가 만들어낸 효과도 있었겠지만,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아나운서들이 그동안 갈고닦은 소리가 '낭독'이라는 방법으로 잘 연주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평소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5분에서 10분 정도 소리 내어 읽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전달력이 분명 좋아진다고 확신한다. 물론 단순히 소리 내어 읽기만을 반복해도 효과는 있겠지만, '전달'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피아노에서 하농으로 손가락의 근육을 단력하듯이 스피치의 좋은 '리듬감'을 얻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를 염두해 연습한다면 더 나은 효과를 볼 것이다.
위의 원고는 최근 읽은 책 중 가장 울림이 컸던 '피로사회' 라는 책에서 녹음을 위해 낭독이 용이하도록 주의할 부분들을 표시한 것이다. 이 원고를 기준으로 보면, 세 가지의 훈련법이 보이는데, 첫째는 <밀어 읽기>다. 문장을 자주 끊어 읽다 보면 낭독 시 의미의 전달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조금 긴 호흡으로 밀어서 읽는 연습이 필요하다. 위의 첫 문장을 예로 들면, '사색적인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라는 문장을 공식적으로 끊어 읽게 되면 '사색적인 삶은 / 보는 법에 대한 ^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로 읽게 되는데, 이를 '사색적인 삶은 ~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와 같이 리듬을 안고 밀어 읽는 버릇을 들이는 것이 좋다. 두 번째는 <단어 강조하기>다. 때론 명사를 '꾹꾹' 눌러서 읽는다라고 표현도 하는데, 주요 단어를 강조해서 읽다 보면 강약이 자연스럽게 생겨 내용에서 주요한 부분을 잘 전달할 수 있게 도와준다. 위의 문장에서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와 같이 주요 단어를 의식적으로 강조해서 읽는 연습이 필요하다. 아나운서 지망생이나 낭독을 별도로 배우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끊어 읽기를 먼저 배운지만, 개인적인 견해로는 끊어 읽기는 자연스러운 낭독에 오히려 방해가 되기 때문에, 최소한의 표시로 가급적 밀어읽기를 연습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세 번째는 <최소한의 장단음>이다. 장단음은 아나운서나 성우들에게는 무척 중요하게 여겨져서 나 역시 아나운서국에서 OJT를 받는 내내 끊어 읽기와 함께 많은 지적을 받곤 했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장단음을 오히려 신경 쓰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장단음의 유래가 중세 한국어에서 성조가 사라지며, 낮은 소리에서 높은 소리로 바뀌던 상성이 장음으로 바뀐데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서울 방언 등에서는 장단음의 구분이 있었는데, 이를 교양 있는 서울말의 발음으로 '표준 발음법' 항목에서 해설해 놓다 보니, 한때는 방송에서 아나운서가 장단음을 틀리면 투고가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아나운서들 발음 중 대표적인 장단음 발음이 '없다'인데, 이를 장음으로 발음하면 '읍:따'와 같이 발음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요즘 세대에게 '낭독'을 이야기하며 장단음을 구분 짓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눈, 밤, 말'과 같이 의미 차이가 있는 단어 세가지만 신경을 썼으면 하는데, 우리 신체의 눈은 단음으로, 하늘에서 내리는 눈: 은 장음으로 발음하며, 어두운 밤은 단음으로 가을에 나무에 열리는 밤:은 장음으로 발음한다. 마지막으로 달리는 말은 단음으로 우리가 하는 말:은 장음으로 발음하면 된다. 위의 문장에서도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를 발음할 때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로 발음하면 자연스러운 리듬감이 생기게 된다.
'낭독'은 노래를 부르는 것과는 다르지만 음악이 시에 생명을 불어넣듯, 글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점에서 무척 매력적인 작업이고, 이를 위해서 평소 글을 소리 내어 읽는 것에 관심을 가져보길 권하고 싶다.
'낭독'은 글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누구나 꾸준한 연습을 하면 좋은 낭독이 가능하며,
이를 위해서 글을 소리 내어 읽을 때 밀어 읽기, 단어 강조하기, 최소한의 장단음을 지켜 연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