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가 이제 곧 사라질 수 있다

작년 회생신청 이후 매각 주관사로 삼정KPMG 선정

by Jason Han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습관처럼 켜던 앱이 있었습니다.

넷플릭스처럼 요란하지 않고, 유튜브처럼 산만하지도 않은. 조용히 좋은 일본 드라마를 골라볼 수 있었던 그 앱. 왓챠 얘기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왓챠가 삼정KPMG를 매각 주관사로 선임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지난해 8월 기업회생을 신청한 지 6개월 만에, 본격적으로 새 주인을 찾기 시작한 겁니다.


왓챠, 도대체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넷플릭스가 게임의 룰을 바꿔버린 날>


사실 OTT는 원래 이렇게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 아니었습니다. 초창기 넷플릭스를 떠올려보면, 본질은 "남이 만든 콘텐츠를 스트리밍으로 유통하는 플랫폼"이었습니다. 물건을 직접 만들 필요 없이 유통만 잘하면 되는, 자본 효율이 높은 비즈니스였죠.

그런데 2013년, 하우스 오브 카드가 나왔습니다.
넷플릭스가 직접 제작한 이 드라마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고, 넷플릭스는 조용히 전략을 바꿉니다. "우리가 직접 콘텐츠를 만들자. 아무도 빼갈 수 없는 우리만의 IP를." 이후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뒤흔들면서 그 판단이 옳았다는 게 증명됐고요.
문제는 이 성공이 업계 전체의 군비경쟁을 불러왔다는 겁니다.


디즈니+, HBO맥스, 애플TV+가 너도나도 오리지널 콘텐츠에 수조 원을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OTT는 어느새 "콘텐츠 유통업"에서 "콘텐츠 제조업"으로 탈바꿈했습니다.


그리고 이 게임에서 왓챠 같은 플레이어는 처음부터 불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넷플릭스는 전 세계 3억 명의 구독자에게 콘텐츠 비용을 나눠 얹습니다. 같은 드라마 한 편을 사도, 왓챠는 수십만 명에게, 넷플릭스는 수억 명에게 비용을 분산하죠. 이 구조에서 콘텐츠 경쟁을 한다는 건,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그래도 버티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왓챠가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넷플릭스와 정면승부 대신, 왓챠는 다른 길을 찾았습니다. 일본 영화, 독립영화, 해외 아트하우스 콘텐츠. 넷플릭스가 굳이 공들이지 않는 틈새 영역을 파고든 거죠. 저처럼 조용히 일본 드라마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왓챠는 꽤 소중한 플랫폼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왓챠는 마지막까지 버텨보려 했습니다.


직원을 260명에서 80명으로 줄이고, 사무실을 다섯 개 층에서 한 개 층으로 줄이고, 자회사와 보유 IP까지 팔아가며 영업손실을 221억에서 20억대까지 끌어내렸습니다. 숫자만 보면 턴어라운드가 가까워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사업이 좋아진 게 아니었습니다.
비용을 330억 줄이는 동안 매출도 300억이 빠졌습니다. 콘텐츠 투자를 줄이자 구독자가 떠났고, 구독자가 떠나자 매출이 줄었습니다. 업계에서는 이걸 "불황형 수익성 개선"이라 부릅니다. 사업을 키운 게 아니라 사업을 줄인 것이라고.
왓챠는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재무 폭탄이 먼저 터졌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한 가지 뼈아픈 반전이 있습니다.

2021년, OTT 시장이 한창 달아오르던 시절, 왓챠는 투자자들로부터 49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를 유치했습니다. 당시 기업가치는 3,300억원. 2023년 상장을 목표로 하던 시절 얘기입니다.


전환사채는 회사가 잘 되면 주식으로 전환해 시세차익을 얻고, 안 되면 채권으로 원금을 회수하는 구조입니다. 투자자 입장에선 꽤 안전한 선택이죠.
문제는 상장이 무산되고, CB 만기가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왓챠는 만기 연장을 협의했지만, 채권자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엇갈렸습니다. 결국 주요 채권자인 인라이트벤처스가 사전 협의도 없이 회생 신청을 냈고, 박태훈 대표는 "통보를 받고 나서야 알았다"고 했습니다.


<왓챠피디아, 마지막 카드>


지금 시장에서 왓챠 인수에 관심을 보이는 곳들이 주목하는 건 사실 OTT 서비스가 아닙니다.
왓챠피디아입니다.


왓챠피디아는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리뷰와 평점을 남기는 플랫폼인데, 현재 7억 5천만 건 이상의 리뷰 데이터와 월 300~400만 명의 활성 사용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리뷰 사이트가 아닙니다. 한국 사용자들이 수년에 걸쳐 자발적으로 쌓아온 콘텐츠 취향 데이터입니다. AI 추천 시스템을 개발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돈을 줘도 새로 만들기 어려운 자산이죠.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OTT 사업은 정리하고 왓챠피디아만 따로 매각하는 것입니다. 채권자들 입장에서도 490억 전액 회수는 어렵더라도, 가장 가치 있는 자산을 빠르게 현금화하는 게 시간을 끌다 청산하는 것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결국 이건 왓챠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티빙도, 웨이브도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누적 결손이 1조원을 넘고, 매년 수백억의 적자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CJ ENM과 SK스퀘어라는 대기업이 뒤를 받쳐주고 있어 버티는 것뿐이고요. 티빙과 웨이브가 합병을 추진하는 것도, 각자로는 이 게임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건 왓챠의 실패가 아니라, 한국 시장 규모로는 넷플릭스가 만든 게임의 룰을 따라가는 게 처음부터 무리였다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오늘도 누군가는 왓챠에서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고 있을 겁니다. 그 앱이 아직 켜져 있는 동안, 저는 미처 다 못 본 일본 드라마나 하나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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