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포기한 그 딜을, 80세 노인은 왜 잡았을까
어제 실리콘밸리발 뉴스 하나가 조용히 퍼졌습니다.
넷플릭스가 워너브라더스 인수를 포기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포기 선언 직후, 넷플릭스 주가가 13% 급등한 겁니다. 보통 인수합병 소식에 주가가 오르지, 포기 소식에 오르는 경우는 드뭅니다. 시장은 넷플릭스의 "안 산다"는 결정에 박수를 보낸 셈이었습니다.
투자자들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160조짜리 인수는 곧 천문학적 부채와 수년간의 불확실성을 의미합니다. 넷플릭스는 지금도 잘 크고 있는데, 굳이 그 짐을 질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런데 넷플릭스가 내려놓은 그 딜을, 누군가 덥석 집어 들었습니다.
<파라마운트라는 이름의 뒤에서>
인수자의 이름은 파라마운트였습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파라마운트의 시가총액은 고작 17조 원입니다. 어떻게 160조짜리 딜을 감당한다는 걸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파라마운트 이름으로 하는 딜이지, 파라마운트 돈으로만 하는 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워너브라더스가 원래 갖고 있던 빚 48조 원을 그대로 떠안고, 뱅크오브아메리카와 씨티 등 금융기관에서 84조 원을 추가로 빌렸습니다. 여기에 카타르, 사우디, UAE 국부펀드까지 끌어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래리 엘리슨.
오라클의 공동창업자이자 자산 200조 원이 넘는 세계 최상위 부호입니다. 그의 아들 데이비드 엘리슨이 스카이댄스를 통해 파라마운트를 소유하고 있고, 이번 딜의 자금 상당 부분이 아버지 래리에게서 나왔습니다.
법적으로는 아들의 딜입니다. 하지만 판을 짠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HBO와 스폰지밥이 한 지붕 아래>
이 딜이 완성되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요.
워너브라더스에는 HBO가 있습니다. 전 세계 드라마 팬들이 사랑하는 그 HBO. 배트맨과 슈퍼맨의 DC,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도 있습니다. 파라마운트에는 CBS, MTV, 니켈로디언, 스타트렉, 스폰지밥이 있습니다.
합치면 어린이가 스폰지밥을 보고, 부모가 HBO 드라마를 보고, 할머니가 CBS 뉴스를 보는, 온 가족이 하루 종일 소비하는 콘텐츠 제국이 탄생합니다.
넷플릭스가 이 딜을 그토록 원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 맥스(워너)와 파라마운트+는 따로따로 넷플릭스와 싸우고 있어서 밀립니다. 합치면 구독자만 2억 1천만 명. 여전히 넷플릭스 3억 2천5백만 명에는 못 미치지만, 적어도 싸울 무기는 생깁니다.
그리고 광고 시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CBS, CNN, HBO, 니켈로디언을 한 번에 팔 수 있다면, 광고주 입장에서는 전 연령대를 한방에 커버하는 꿈의 패키지가 됩니다.
<CNN이라는 이름의 티켓>
그런데 이 딜에서 가장 흥미로운 자산은 의외로 CNN입니다.
CNN은 솔직히 돈이 되는 자산이 아닙니다. 시청자는 계속 줄고 있고, 워너브라더스가 한때 팔려고 내놨지만 살 사람이 없어서 못 팔았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CNN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전 세계 공항 라운지, 호텔 로비, 국제회의장에 켜져 있는 화면이 CNN입니다. 대통령, 외교관, 기업 CEO들이 보는 채널입니다. 돈을 버는 자산이 아니라, 세계 엘리트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을 수 있게 해주는 티켓 같은 존재입니다.
루퍼트 머독이 폭스뉴스로 번 돈은, 폭스뉴스 자체의 수익보다 폭스뉴스가 만들어준 정치적 영향력으로 얻은 기회가 훨씬 컸습니다. 래리 엘리슨이 CNN에서 보는 것도 비슷한 그림일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스크>
아름다운 그림에는 항상 이면이 있습니다.
130조 원이 넘는 부채가 가장 무겁습니다. 금리가 높은 지금, 이자만 매년 수조 원입니다. 스트리밍 수익이 꾸준히 받쳐주지 않으면 버티기 어렵습니다.
통합의 역사도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워너브라더스는 AT&T에 인수될 때도, 디스커버리에 인수될 때도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핵심 인재가 떠나고, 문화가 충돌하고, 기대했던 시너지는 한참 뒤에야, 혹은 영영 오지 않았습니다.
스트리밍 시장 자체도 성장이 꺾이고 있습니다. 넷플릭스조차 계정 공유를 막고 광고 요금제를 도입하며 쥐어짜고 있는 상황에서, 후발주자로 따라잡는 일은 갈수록 가파른 오르막이 되고 있습니다.
<돈인가, 유산인가>
래리 엘리슨은 80세가 넘었습니다. 그리고 자산이 200조 원이 넘습니다.
솔직히 이 나이, 이 자산이면 더 이상 돈이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투자처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가 노리는 현실적인 목표는 오라클입니다. 지금 오라클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에 밀려 클라우드 시장 4위입니다. 워너+파라마운트를 그룹 안에 두면, 이 거대한 미디어 제국의 서버를 오라클이 돌리게 됩니다. AI 시대에 클라우드 수요가 폭발하는 지금, 이 포석의 무게는 가볍지 않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것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빌 게이츠는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정의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전기차와 우주로 향했습니다.
래리 엘리슨은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을까요.
기업용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의 황제로? 아니면 AI 시대의 미디어-테크 제국을 설계한 사람으로?
160조는, 어쩌면 그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