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역할의 변화일까? 일본 육식녀, 초식남과의 비교 단상
'에겐남'과 '테토녀'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에겐남은 여성 호르몬 에스트로겐(Estrogen)을 뜻하는 에겐과 남성의 합성어, 테토녀는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Testosterone)과 여성의 합성어로, 각각 여성화 되는 남성과 남성화 되는 여성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2021년 6월에 다이어트 콘텐츠 크리에이터 이상수가 자신의 블로그 <수성일기>에 올린 ‘연애 먹이사슬 분석 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인스타툰 작가 ‘내쪼’가 이를 인스타툰으로 만들며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관심을 끌게 됐다.
언제부터인가 이 '에겐남'과 '테토녀'라는 신조어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의 성 역할 변화가 화두가 되고 있다. 필자는 오랜 시간 기업의 중역으로 일하며 수많은 젊은 인재들을 마주해 왔다. 그 과정에서 최근 우리 사회의 성 정체성과 감정 표현 방식이 얼마나 극적으로 변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을 겪었다.
사건은 디자인 품평회 현장에서 일어났다. 한 젊은 남성 사원의 디자인 결과물을 리뷰하던 중, 실무적인 관점에서 몇 가지 지적을 던졌을 때였다. 필자는 이내 당혹스러운 광경을 목격했다. 지적을 받은 그 사원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외형이었다. 그는 결코 '여리여리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키는 180cm를 훌쩍 넘고 체중은 100kg을 짐짓 넘길 듯한, 이른바 '테토남'의 풍모를 지닌 건장한 청년이었다.
여직원들도 그런 회의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적이 없다. 오히려 상사의 업무상 지적에 대해서는 마치 준비된 것처럼 대안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여왔던 것과 대조적으로, 가장 남성적인 외형을 지닌 이 사원이 보여준 '눈물'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물론 이 사건을 모든 남성에게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이는 현대의 남성성이 더 이상 강인한 외피 안에 에스트로겐적 감수성을 숨기지 않는 시대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로 후에 이 직원은 본인이 '의외의 에겐남'소리를 자주 듣는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는...)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걸까? 이 현상은 경제적 구조 변화, 젠더 권력의 재편, 그리고 생리학적 자기관리 열풍이 맞물린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 성 역할의 해체와 '자기 주도성'의 전이에 그 원인이 있다.
과거 일본에서도 '초식남·육식녀'라는 성 역할의 전이 현상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테토녀, 에겐남은 일본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일본의 초식남·육식녀 현상이 장기 불황에 따른 남성의 무력감과 여성의 적극성 발현이었다면, 한국의 현상은 생존을 위한 자기 브랜딩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통적 성역할의 변화 관점에서 성 정체성, 자아연출을 의미하는 젠더스크립트의 역전과 자기애적 진화가 그 핵심에 있다. 전통적 가부장제 질서가 약화되면서 여성이 경제적·사회적 주도권을 쥐는 사례가 늘어나 테토녀는 사회적 성취와 신체적 강인함을 결합하여 기존의 보호받는 여성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주체적 욕구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에겐남은 자기애적 진화로, 일본의 초식남이 연애와 성취를 포기한 형태라면, 에겐남은 에너지를 가족 부양, 사회적 성공 등 외부가 아닌 자기 계발, 미용, 건강 등 내부로 돌린 형태다. 이는 경쟁 사회에서 나만의 가치를 높이려는 전략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는 오히려 유교적 가치가 해체되며 발생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성 회귀로 해석될 수도 있다. 우리는 흔히 가부장제를 한반도의 오랜 전통이라 오해하지만, 한민족은 고려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높은 편이었고 남녀 평등한 지위를 가진 사회적 체제를 갖고 있었다. '장가간다'는 말의 어원이 보여주듯, 고려시대 이전에는 남녀가 결혼을 하면 남성은 장가(처가)에 데릴사위로 가고 여성 중심의 가족제를 이루다가 자녀가 모두 성장하면 비로소 남성의 집으로 옮겼다. 지금도 손주들은 외가에서 키우는 풍습이 남아있는데, 고려 이전의 풍습이 아직도 면면히 내려오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화랑 제도는 원화라는 젊은 여성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것이 시초였다. 이러한 능동적인 여성 중심 풍습을 바꾸기 위해 유교를 국교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남성중심 사회로 바꾸는 노력을 국가적으로 기울였을 정도로 관련 기록들이 남아있다.
생리학 및 행동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호르몬과 신체 자본화 현상에도 원인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테스토스테론'은 생물학적 수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심리적 자기 효능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테토녀와 근력 자본 관점에서 최근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피지컬 트레이닝(바디 프로필, 크로스핏 등)은 여성 호르몬의 범주를 넘어선 강력한 신체를 지향한다. 근력 운동을 통해 분비되는 도파민과 성취감은 사회적 공격성(좋은 의미의 추진력)을 강화하며, 이는 행동 양식의 변화로 이어진다.
남성은 어떨까? 에겐남의 관리된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볼 때, 남성들이 미용과 패션, 섬세한 감정 소통에 집중하는 것은 테스토스테론의 발산 방식이 물리적 힘에서 사회적 매력으로 이동했음을 시사한다. 거친 남성성보다는 관리된 청결함과 에너지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 더 높은 생존 점수를 받기 때문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 배경, 저성장 시대의 '대리 만족'과 '효율성'의 측면에서도 중대한 시사점이 있다. 일본의 사례와 비교했을 때, 한국은 훨씬 더 공격적인 경쟁 환경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정리하여 표로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테토녀는 결혼이나 출산이라는 전통적 과업 대신 '나의 커리어'와 '나의 신체'에 투자하며 사회적 경쟁력을 확보하는데 반해, 에겐남은 집 장만과 같은 불가능할 것 같은 목표와 불확실한 미래에 올인하기보다, 당장 결과가 보이는 자신의 외모와 현재의 가치에 집중하는 가성비 위주의 삶을 지향한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 한국 사회가 성별에 따른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개인의 역량과 매력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은 더욱 진취적이고 강인한(Testosterone-driven) 모습을 통해 사회적 영토를 확장하고, 남성은 기존의 강박적 남성성에서 벗어나 자신을 가꾸고 사회적 이미지를 관리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성별 간의 대립이라기보다, 불확실한 시대에 각자가 선택한 최적화된 생존 양식으로 보아야 한다.
여성이 진취적인 영토 확장을 꿈꾸고 남성이 강박적 남성성에서 벗어나 자신을 가꾸는 이 풍경은, 우리 사회가 더욱 유연하고 다채로운 생존 방식의 진화 단계에 진입했음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