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길을 지나 어둠에 잠긴 논두렁을 가로질러 나와 동생은 서로의 손을 맞잡은 체 집으로 향했다.
풀벌레 소리와 개구리울음소리만이 요란했던 그 까만 밤.
가로등조차 드물었던 그 시골에서 그 몇 안 되는 가로등 중 하나가 우리 집 앞을 밝히고 있었다.
어머니는 외로운 가로등 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어둠의 켠에 있던 나는 밝음의 켠에 있던 불안해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초조해하시며 발을 동동 구르시던 어머니는 저 멀리서 걸어오는 우릴 보시곤 소리치셨다.
"어딜 갔다가 이제야 오는 거야!"
어머니의 성난 소리에 동생은 내 손을 뿌리치고 어머니께로 달려가 품 안에 안겼다.
그리고 걸어오는 동안 아픈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던 나는 땅으로 향한 후래쉬 불빛에만 시선을 고정한 체 터벅터벅 어머니께로 걸어갔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어머니 앞에 멈춰 서자 어머니는 내 볼기짝을 손바닥으로 때리기 시작하며 "동생까지 데리고 이 시간까지 뭘 하다 이제 왔냐!"며 혼을 내셨다.
그러나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 말도 않은 체 그 매를 다 맞아냈다.
그러다 어머니의 매가 잦아들 때쯤 말했다.
"아빠가 많이 아파서 약 사다 주고 오느라 늦었어......"
정말 그때까지 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또 엄마의 매질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내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목 언저리에서 아프게 맺혀 있던 울음이 일순간 터져 나왔다.
갑자기 집 앞은 나의 울음과 따라 우는 동생의 울음으로 한동안 울음바다가 됐다.
그냥 "엉... 엉..."하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머릿속에선 자꾸 어두운 숙직실에 누워 혼자 끙끙대던 아버지의 모습만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불쌍했다.
국민학교 2학년 어린 나의 생각에 아버지가 혼자 아프다는 게 못 견디게 슬펐다.
내가 아프면 어머니는 옆에서 밤새 내내 찬 물수건을 이마에 얹어주고 아버지는 날 업고 병원까지 뛰어가고 동생은 아끼던 사탕도 나에게 양보했는데, 아버진 혼자 그 골방에서 힘들어한다는 게 너무나 슬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파서 힘들어할 아버질 생각하니 정말 울고 싶지 않았는데, 아니 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자꾸 눈물이 나고 울음이 그치질 않았다.
나의 설운 울음에 어머니는 애잔한 눈으로 내려 보셨다.
그리곤 무릎을 꿇고 나와 눈높이를 맞추시곤 날 꼬옥 안아주셨다.
"아... 그랬구나. 우리 아들이 그래서 늦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슬프게 우는구나......
그런데 아빠 금방 나을 거니까 이제 그만 울어. 뚝... 그만 뚝......"
어머니의 말에도 한동안 나의 서러운 울음은 계속됐다.
우는 내내 어머니는 더 이상의 말없이 내 볼을 쓰다듬어 주시거나 다시 안아주시길 반복했다.
그런 나를 보며 동생도 어야 태야(아이고아이고의 전라도 방언) 울어댔다.
"엉... 엉... 아빠한테 약 사서 갔는데... 아빠가 팔에 알통도 만들었어... 아빠가 다 나았다 그랬어... 엉... 엉..."
어린 나보다 더 어렸던 동생도 아마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의 울음이 진정된 후 어머니는 눈물로 세수한 우리들을 깨끗이 씻겨주시곤 잠자리에 눕게 했다.
그리곤 아버지의 사무실로 전화를 거셨다.
"OO아빠, 몸은 좀 괜찮아요?
아... 다행이네.
그런데 아까 얘들이 무슨 약 사서 당신한테 갔다던데?
아... 아... 그랬구나."
어머니께선 슬쩍 잠자리에 누워 어머니가 통화하시는 모습을 바라보는 나를 보며 찡긋 웃어 보이셨다.
"그런데 OO아빠, 당신 딸이 그러는데 얘들 앞에서 알통 자랑했어요?"
어머니의 말에 수화기 너머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질문한 어머니도 함께 웃기 시작하셨다.
왠지 모르게 나는 그 순간 마음이 놓였다.
아버지가 다 나았다는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들은 것도 아니었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버지의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웃음소리에서 아버지가 괜찮다는 믿음과 함께 마음이 안정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거짓말처럼 스르륵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든 내내 내 이마와 볼을 쓰다듬어 주시는 어머니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진 전날과는 다르게 아주 건강해 보이셨다.
그리고 그 당시 아이들의 인기 선물이었던 과자꾸러미인 종합선물세트와 내가 좋아하는 귤 한 상자를 같이 사 오셨다.
그 날밤 우리 가족은 참 많이 웃었던 걸로 기억한다.
같이 저녁을 들면서도 웃고, 같이 티비를 보면서도 웃고...
비록 종합선물세트 안의 과자 중에서 서로 맛있는 걸 차지하려고 동생과 다투기도 했지만 그날만큼은 그런 모습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크게 웃으셨다.
정말 행복한 밤이었다.
병 치른 후에 몸 축난 아버지를 위해 특별히 신경 쓴 어머니의 저녁 밥상도 맛있었고, 엄마 아빠 품에 번갈아 안겨가며 재잘대는 것도 좋았고 또 머리맡엔 넘치게 많은 과자가 있는 그런 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환해진 아버지의 얼굴과 목소리가 묵은 마음을 밀어내게 해주는 그런 밤이었다.
그 밤,
그런 우릴 보며 창문 밖 달님도 환하게 웃고 있었고
별님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는 땅으로 내려와 이슬이 되었고
코스모스들의 감미로운 향기는 재 너머 불어온 바람에 실려 우리 집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 끝 >
※ 사진 : 광동제약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