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의 마음으로 세상 보기
친구가 바닷가로 이사했다. 도시 한복판에서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산 아래로 가서 몇 년 살더니 이번엔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지척에 있는 산을 지고 살 때는 산책하며 본 새와 나무, 꽃 이야기를 하더니 요즈음은 바다 냄새를 전해온다.
오늘은 비에 젖은 바다를 비롯하여 몇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의 크기를 키우자, 무궁화 같은 접시꽃이 우리 집 거실을 연분홍으로 물들였다. 개망초에 노란색 물감을 칠한 것 같은 금불초는 꽃 빛깔이 비를 맞아 더 선명하다. 조릿대를 타고 올라간 박주가리엔 브로치 같은 꽃도 피었다. 해변 공원의 주인공들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사진이, 애들 말대로 대박이다. 빨간 장미꽃을 붙인 검정 고무신에 발목 위로 올라온 무지개색 양말이라니. 거기다 무릎에서 발목까지 물결치듯 겹쳐 내려온 치마에는 노랑, 빨강, 분홍 꽃들이 빈틈없이 피어있다. 그걸로도 모자랐을까. 온몸을 감쌌을 샛노란 우비가 금불초꽃보다 밝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친구라는 걸 금방 알았다. 며칠 전에는 보라색 공단 치마에 빨간 장미를 단 검정 고무신이더니 오늘은 더 파격적이다.
지난번에도 노란 우비 쓰고 줄무늬 양말에 고무신 신고 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러 나갔다고 했다. 그날 친구는 “이순이나 여섯이나 집 나서는 마음은 같은가 봐.”라고 했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더니 마음뿐 아니라 옷차림에도 나타나나 보다.
간간이 하이쿠 같은 짧은 글을 적어 보내던 친구가 요즘엔 긴 글을 써 보낸다. 글을 쓰다가 졸음이 밀려와 자고 일어나 보면 노트에 글이 쓰여 있다고도 한다. 산 아래 살 때는 눈을 떠도 감아도 그릴 그림이 보인다더니 바닷가로 옮기고 나서는 글이 바다에서 출렁이나 보다.
그림은 안 그려지는데 글 쓰는 게 재미있다더니 아마 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지난번에는 산책길에 만난 시 낭송가가 자신이 쓴 글을 읽어주는데 마치 글이 춤추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날 친구의 목소리는 파도처럼 리듬을 탔다.
오늘은 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그녀를 불러낸 걸까. 아무래도 속을 알 수 없는 바다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더니 그 병이 깊어지고 있나 보다. 바다의 구슬이 되어 바다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해옥당海玉堂’이라는 당호까지 지었다는 친구. 내가 바다에 구슬을 바다의 구술로 알아들을 만큼 바다에 진심인 친구다.
그림 그릴 땐 일바지를 입는데 글을 쓸 땐 비단 치마를 입고 쓴다는 친구. 오늘도 물에서 건져 올린 말을 글로 옮겨 보내왔다. “예술가가 3%의 멋을 빼면 남는 게 없다.” 는 말에 내 모습을 살펴봤다. 난 1%의 예의도 없어 보이는 차림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글로도 예의로도 당당 멀었다. 나와 360도 다른 그녀는 나의 ‘사브레’ 다. 입이 궁금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브레는 여섯 살의 바삭함과 이순의 풍미를 다 갖춘 과자다.
지천명에 백혈병으로 고생하다 딸의 피를 받아 살아나서 젊어졌다는 그녀의 인생 2막은 여섯 살에서 다시 시작한다. 왠지 여섯 살이 좋다. 유치원에 수업하러 가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설렜던 걸 생각하니 예전부터 여섯 살의 행동이, 마음이 좋았나 보다. 여섯 살이 된 손주도 곧잘 논리적으로 말하고 옳고 그른 것을 가려서 이야기한다. 내 아이들도 여섯 살 때는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했다. 때로는 고집도 부리지만 새로운 걸 받아들이고 익히며 창작하여 나를 정신 번쩍 들게 하는 나이, 여섯 살이다. 손주가 친구 같고 친구가 손주 같은 요즈음이다. 오늘도 여섯 살의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여섯 살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그리며 쓰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