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평화를 깨트리는 리더의 뜨거운 진심에 대하여
회의실을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방금 또 터뜨렸다.
의견이 묵살됐다. 동의할 수 없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참으려 했다. 참지 못했다. 목소리가 올라갔고, 분위기가 굳었고, 회의는 그 폭발로 끝이 났다.
자리로 돌아왔다. 모니터를 켰지만 커서만 깜빡였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도, 샤워를 하면서도, 불 끄고 누운 천장에서도 같은 장면이 재생됐다. 며칠이 지나야 겨우 흐려졌다. *또 망쳤다. 왜 그랬을까. 왜 이걸 못 참을까.*
사회 초년생 시절, 이런 날이 꽤 많았다. 학교에서 배운 건 '이기거나 꺾이거나' 두 가지뿐이었다. 회사도 다르지 않았다. 의견이 무시되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가장 끔찍했던 건 입사 3년 차의 어느 설계 회의였다. 내가 제안한 설계안이 한마디로 묵살됐다.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그러면 저는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네요." 회사를 그만두겠다며 그대로 퇴근해 버렸다. 만류하는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나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출근했다.
이런 반복이 참 오래 이어졌다.
그래도 노력은 했다. 듣는 연습, 반응을 늦추는 연습.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개발자에서 교육자로 전향한 2010년대 중반. Next Institute(넥스트)가 문을 닫아가던 시절이었다.
네이버 대표와 넥스트 교수진이 한자리에 모인 저녁 식사 자리. 넥스트의 마무리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공식적이고, 조심스러웠다.
대화가 겉돌았다. 서로 예의를 차리며 젓가락만 움직였다. 네이버 측의 구체적인 안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쌓여 있던 불만 위에, 눈앞의 정중한 침묵이 더해졌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저는 지금 이 자리가 무엇을 위한 자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분위기가 굳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젓가락을 내려놓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또 분위기를 망쳤나.*
그런데 달랐다.
그 한마디가 도화선이 됐다. 잠시 멈췄던 대화가 다시 시작됐고, 이번엔 진짜 속내가 나왔다. 격식의 껍데기가 벗겨지자, 그 아래 실제 대화가 흘러나왔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말이 얼마나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말인지, 그날 처음 선명하게 느꼈다.
그날 이후로, 회의실의 침묵이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회의실이 조용하다. 불길할 만큼.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질문도 없었다. 누군가 방향을 제시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표면적으로는 효율적인 회의였다.
*이 사람들이 진짜로 동의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넘어가는 걸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얼굴로 솔직한 말을 삼키는 느낌이 든다. 회의는 끝나도 진짜 문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패트릭 렌시오니(Patrick Lencioni)가 말한 가짜 평화(Artificial Harmony)다.
심장 박동수가 올라간다. 문제의 본질을 꺼낼까, 말까. 몇 번을 고민한다. 결국 약간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가끔은 문제의 본질을 찾기 위한 대화로 이어지고, 가끔은 어색한 분위기로 회의가 끝난다.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며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위기라면서 왜 이렇게 조용합니까?"
입사 7년 만에 처음 보는 임원 회의였다.
배달의민족(우형)이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신임 CEO가 임원들을 모았다. 서두 발언이 끝나고, CEO가 질문을 던졌다.
"현재 우형이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시나요?", "위기 상황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원인을 짚는 사람도, 극복 방안을 꺼내는 사람도 없었다.
그 정적이 이해됐다. 신임 CEO 앞에서 '문제의 본질'을 꺼내기란 쉽지 않다. 괜히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눈치를 보게 된다.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우형이 위기라고 느끼면 이렇게 조용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배민다움이 왜곡되면서 서로를 배려한다는 이유로 솔직한 말을 삼키고 있는 건 아닌가요? 위기라면, 이제는 좀 더 솔직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또 터뜨렸다. 또 분위기가 굳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다음이 달랐다.
그 말이 끝나자, 회의실 공기가 바뀌었다. 눌려 있던 말들이 하나씩 터져 나왔다. 진짜 문제가 테이블 위에 놓이기 시작했다.
회의가 끝난 뒤, 신임 CEO가 먼저 다가왔다.
"재성님 덕분에 오늘 활발한 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래 품어온 질문의 답을, 뜻밖의 자리에서 받았다.
두 사건을 돌아보면서 하나를 발견했다.
사회 초년생 때는 터지고 나면 회의실이 얼어붙었다. 두 번의 사건에서는 터지고 나서 회의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똑같이 회의실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똑같이 그 순간 후회가 치밀어 올랐고, 똑같이 돌이킬 수 없는 말이 입 밖에 나가 있었다. 달라진 건 하나. 방향이었다.
초년생 시절의 폭발은 자기 방어였다. 의견이 무시될 때,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 같을 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나를 지키기 위한 감정이었고, 그래서 주변을 다치게 했다.
두 번의 사건에서는 감정의 방향이 달랐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말인데 아무도 하지 않을 때, 그 말을 꺼내기 위해 감정을 썼다.
달라진 건 능력이 아니었다. 나이와 경험이 쌓이면서 '내가 무시당했다'는 생각이 조금씩 옅어졌고, 그 자리에 '이 문제를 방치하면 안 된다'는 책임감이 생겨났다.
과거엔 감정이 나를 향해 있었다. 지금은 문제를 향해 있다.
리더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건 종종 약함으로 읽힌다. 차분하게, 합리적으로, 감정 없이. 그게 성숙한 리더의 이미지다. 하지만 때로는 논리보다 강력한 것이 있다.
가짜 평화가 드리운 회의실에서, 진심 섞인 한마디가 정체된 공기를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
물론 매번 맞은 건 아니다. 방향을 틀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를 지키기 위한 폭발이었던 적도 있다. 상대가 다치고 나서야 알았다. 방향을 구별하는 일은 폭발 이후에야 가능했다. 그래서 여전히 어렵다.
그런데 이제는 크게 두렵지 않다. 단점을 지우려는 노력을 멈춘 게 아니다. 단점이 쓰일 수 있는 자리를 찾는 법을 배운 것이다.
누군가는 물을 수 있다. 그래도 감정을 조절하는 게 맞지 않나요?
맞다.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조절이란 억누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언제 터뜨릴지 아는 것. 누구를 향해 터뜨릴지 아는 것. 그리고 왜 터뜨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놓지 않는 것.
26년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는 지금도, 여전히 때때로 감정적이다. 완전히 고쳐지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질문이 바뀌었다. '왜 나는 이걸 고치지 못할까'에서, '이걸 어디에 쓸 수 있을까'로.
아직 답을 다 찾은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