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추억 (1)

첫 아들의 죽음

by 진우


1969년 유월, 나는 돈을 벌기 위해 부산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내 땅이라고는 손바닥만큼도 없는 촌구석에 있어본들 대代를 이은 소작농 신세를 벗어날 방법은 막연했고, 설령 운 좋게 남의 땅을 부쳐먹게 된다 하더라도 종살이나 다름없는 그 비루한 꼴을, 적어도 내 자식들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계획을 말했을 때, 아내는 순순히 내 뜻에 따라주었다. 아내 역시 한 뼘이라도 좋으니 ‘내 땅’이 있어야 된다고, 몇 년만 고생하면 우리도 땅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다섯 살배기 딸과 갓 태어난 아들은 자신이 책임지고 키울 테니 아무런 염려 말고 다녀오라며 나를 격려해주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대는 예상외로 완강했다. 형도 몇 해 전 이미 부산으로 살림을 옮긴 마당에 나까지 객지로 보낼 수는 없다, 집은 누가 지킬 거냐, 그렇게 사흘 밤낮을 우셨다. 이까짓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얼른 큰돈 벌어와서 고대광실로 새로 지어 드리겠노라 호언장담을 하고는, 나는 길을 재촉해 부산행 밤배에 몸을 실었다.


그때, 내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SE-826e169c-3d5b-4d99-b337-b21a50041fab.jpg?type=w1600 맨 오른쪽 언덕배기 파란 양철 지붕 옆 초가가 우리 집이다. 이건 그나마 꽤 많이 개량된 1980년대 말의 모습이다.


어렵사리 길을 물어가며 형의 집을 겨우 찾아냈다. 그러나 형은 나를 반기기는커녕 대문간에 서서 다짜고짜 욕부터 퍼부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하고 너 혼자 이렇게 왔냐고, 아버지 산소는 누가 돌볼 것이며, 그리고 농사만 짓던 주제에 도회지에서 무엇을 해 먹고 살 거냐 윽박지르던 형은 나중엔 내게 손찌검까지 했다. 하룻밤만 재워달라는 말은 애당초 꺼낼 수조차 없었다.


솟구치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으며 돌아서는데 골목 어귀까지 따라온 형수가 꼬깃꼬깃 천 원짜리 두어 장을 나의 주머니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결국 그날은 어딘지도 모를 변두리 여인숙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다음날 동이 트기 전부터 일자리를 찾아 발품을 팔며 부산 시내를 닥치는 대로 돌아다녔다. 다행히 운이 좋았던지 사흘이 채 지나지 않아 전포동 신진 공업사 초입에 있는 건축 현장에서 잡부 자리를 얻게 되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건물 처마 밑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십 원짜리 하나 쓰기가 아까웠다.


공사장을 책임지던 반장은, 속초가 고향인 박용길 씨였다. 강원도 사투리에 막걸리를 즐겼던 박반장은, 시키는 일마다 열심인 나를 좋게 보았던지 이후 공사를 할 때마다 나를 데모도手もと(조수)로 데리고 다니며 조금씩 일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내남 어데 있갔니. 정들면 마카 한 가족이잖소.


그리고 박반장의 소개로 광주 사람 김만종 목수도 알게 되었다.


아따, 잡부만 하면 안된당께. 기술이 있어야제. 동상은 눈치가 빠르고 손재주가 조응께 목수 일을 배워부러야혀. 나가 싹 다 가르쳐줄팅께.


나는 두 사람을 형님으로 모시면서 죽기 살기로 목수 일을 배웠다. 물론 욕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욕먹는 값으로 돈을 버는 거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현장을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생활이 불편했던 우리 셋은 의기투합하여 함께 살 집을 구했다. 전포동 산동네에 있는 루핑 Roofing 집이었다. 루핑 집은 나무로 대충 기둥을 세운 다음,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로 지붕을 얹은 것이다. 보증금 3만 원에 월 1만 5천 원. 1970년 그 당시 쌀 한말에 1만 6천 원, 내 일당이 7백 원이었으니 혼자 살림이었다면 쉽게 엄두를 낼 수 있는 돈은 아니었다.


%EB%A3%A8%ED%95%91%EC%A7%91.jpg?type=w1600 루핑 집 (사진출처 : 네이버 이미지)


육이오 때 월남했다는 주인집 어머니가 열댓 살 먹은 막내딸과 큰방을 쓰고, 홀아비 셋은 아랫방을 썼다. 두 평이 채 되지 않는 비좁은 방이었으나 떠돌이 생활에 지쳤던 우리에게 그런 아방궁이 따로 없었다.


먼 객지에 나와서 고향 어머니를 다시금 만났다는 용길 형님의 너스레가 싫지는 않으셨는지 주인집 어머니는 이따금 꽁치 대가리를 듬뿍 넣은 찌개를 끓여주시거나, 방구석에 처박아둔 썩기 직전의 고린내 나는 옷가지들을 꺼내 깨끗이 빨아 주실 때도 많았다.


돈 버는 재미에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해가 바뀌는 줄도 몰랐다. 새봄이 막 시작되려던 4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점심을 먹고 양지 녘에서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현장 주변을 맴돌면서 기웃거리는가 싶더니 곧 나를 찾는 것이었다. 그는 뜻밖의 기별을 전했다.


임목수 맞지요? 이것 참 머라캐야되노. 다른 게 아니고, 고향집에 있는 아들이... 어제 죽었다캅니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 앞이 핑 돌았다. 아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첫돌이 이제 겨우 두어 달 남았는데, 그런 아들이 죽다니.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이건 뭔가 잘못된 기별이다. 절대로 그럴 리 없다.


소식을 전해 들은 박반장과 김목수도 펄쩍펄쩍 뛰면서 사람을 그렇게 놀리는 것 아니라며, 우선 고향마을에 전화부터 해보라고 했다. 한참 만에 연결된 장거리 전화 속에서 마을 이장 종태 형님이 한숨을 쏟아냈다. 아이고, 이 문디 자슥아. 와 그리 왕래가 없었노. 그래도 설에는 다녀갈 줄 알았다.


아들의 돌 때 입히려고 사둔 한복과 딸아이의 장난감들을 가방에 쑤셔 넣는데 눈앞이 자꾸만 흐려졌다. 마당에선 주인집 어머니의 곡소리가 구슬펐다. 아이고, 머이 어드래, 머이 어드래. 불쌍한 우리 간나, 어쩜 좋으니.




꼬박 하루가 걸려 고향 마을에 도착했다. 조무래기들이 나를 따르며 웅성거렸다. 말을 건네려는 사람들을 애써 무시하고 집으로 내달렸다. 그러나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툇마루에 쓰러져있던 어머니는 울다 지쳤는지 겨우 힘을 짜냈다. 배낭골에 올라가 봐라.


소꼴을 베러 오르내리던 험한 배낭골을 단숨에 올랐다. 풀숲 사이로 뛰어다니던 딸이 나를 보더니 와아 아부지 소리를 지르며 달려왔다.


엄마는, 엄마는 어데 있노?


딸이 손을 들어 가리킨 곳에 조그만 돌무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아내가 보였다.


니 와 이라고 있노? 도대체 무슨 일이고? 말을 해라, 말을!


아내는 그러나 아무 말이 없었다.


제발 정신 차리 봐라. 멀쩡한 얼라가 갑자기 왜 그리 됐나 말이다!


나는 아내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미동도 없던 아내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내가 죽였소. 무식한 여편네가 아들을 죽였소.


커억커억 흐느끼던 아내가 곧 악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이 무식한 년이 멀쩡한 자식새끼를 죽였단 말이오!


아내가 왈칵 피를 토했다.


사월 진달래보다 더 붉은 피가 아내의 하얀 소복 위로 쏟아졌다.


%EC%A7%84%EB%8B%AC%EB%9E%98%EA%BD%83.jpg?type=w1600 붉게 흐드러졌던 진달래, 그리고 진달래 (사진출처: 블로그 그때그산길)


사촌들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죽은 놈은 죽은 놈이다. 울고 있다고 죽은 자식이 살아서 돌아오나? 주저앉아서 죽은 자식이나 그리워하라고? 그럴 순 없지. 그래선 안되지.


아내와 어머니에게 변변한 인사도 하지 않고 나는 다시 집을 나섰다.


딸이 장난감을 내팽개치고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뿌리쳤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반나절도 안되어서 이렇게 가는 법이 어디 있냐고, 네가 정녕 애 죽은 아비 맞냐고, 성난 형님들이 길을 막아섰지만 그들을 밀쳐내고 나는 신작로로 뛰었다. 부지런히 달리면 부산 가는 막차를 탈 수는 있을 거다. 읍내로 가는 오후 네시 반 버스에 오르면서 아들이 묻힌 배낭골을 슬쩍 쳐다보았다.




하루 만에 부산으로 돌아온 나를 보고 용길 형님과 만종 형님도 화를 내기는 마찬가지였다. 매정한 인간이랑 같이 못 살겠다. 나가라. 돈만 밝히는 너 같은 놈은 사람새끼도 아니다.


주인집 어머니도 울면서 거들었다. 간난이 잃은 에미나이라도 보살펴주고 와야지, 이렇게 오면 어드러케 하니. 독한 종자 따로 없다더니 네가 그런 사람인지 몰랐다고. 죽은 자식이 저승에라도 편하게 가겠냐고. 주인집 어머니가 연신 나를 다그쳤다.


저승이란 말을 듣자 꼬박 이틀을 참았던 눈물이 갑자기 터졌다. 용길 형님 앞에 무릎을 고쳐 꿇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겨우 이렇게 말했다.


형님, 미친놈처럼 돈 벌어서, 죽은 자식 무덤이라도 잘 꾸며 줄랍니다. 소가 밟던 돌 밑에 자식새끼 대충 묻어놓고 왔으니, 빨리 돈 벌어서, 큰돈 벌어서 잔디 덮은 예쁜 무덤 하나 만들어 줄랍니다. 제발 도와주이소.


용길 형님과 만종 형님을 끌어안고 밤이 새도록 셋이서 그렇게 같이 울었다.


1970년 4월 6일, 음력 삼월 초하룻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