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추억 (2)

젊은 날의 눈물

by 진우


겉으로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썩어 문드러진 내 속을 사람들이 알 리 없었다. 아니,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살아선 고작 열 달, 그중 내 품에선 겨우 두어 달. 그 짧은 인연이 못내 서러웠던지 아들은 밤마다 꿈마다 나를 찾아왔다.


아내가 저만치에서 나를 보며 손짓한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달려가면, 아내가 안고 있는 포대기 속에서 아들이 얼굴을 슬며시 내민다. 환하게 웃는 얼굴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는데 아들의 얼굴이 갑자기 퍼렇게 변한다. 아버지, 부산 가지 마세요. 아버지, 병원 한 번만 데려가 주세요. 아버지, 주사 한 번만 맞게 해 주세요.


겁에 질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다 끝 모를 바닥으로 추락하기를 수 차례, 그러다 부릅 눈을 뜨면 다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루핑 천장이 그제야 보였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아따, 우리 동상이 또 몹쓸 꿈을 꾸었는갑소잉. 내 그 맘 잘 알제. 울 엄니도 우리 누이 저 세상 먼저 보내 불고 한 삼 년 그리 고생하시더마잉.


아니라고, 그런 거 아니라고. 그저 더워서 그런 거라고. 방문을 열고 나가는데 만종 형님이 또 한마디를 내 등에다 집어던졌다. 염병 허고 있네. 춘삼월이 머시 덥당가. 똥개도 담요를 덮고 자는디.


삼월의 전포동 밤하늘은 그렇게 슬펐다. 그러나 달은 밝았고, 별도 빛났다. 그 별과 달 사이로 기억마저 희미한 내 아버지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러자 빌어먹을 눈물이 또 주르륵 흘렀다.


아버지, 뭐할라꼬 나를 낳았습니꺼.




1938년 음력 오월 사흗날, 나는 경남 남해의 산골 마을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마을은 다랑논 몇 마지기와 감자, 고구마 따위를 심는 비탈밭 몇 뙈기가 전부인, 전형적인 빈촌貧村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 때부터 남의 집에서 일을 하거나 땅을 대신 부쳐준 그 품삯으로 겨우 연명해 온 소작농이었다. 말이 소작농이지 종노릇이나 다를 바 없었다. 가난한 중에서도 더 가난한, 그래서 동냥 거지도 그냥 지나친다는,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 우리 집이었던 것이다.


외가는 그런대로 살았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당신이 여덟 살 되던 해에 한쪽 눈을 실명했다. 병이었는지 사고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쪽 눈동자가 없는 처녀에게 제대로 된 혼처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가난했으나 그나마 족보가 있는 집이라는 것을 명분 삼아 외가로부터 쫓겨나듯 오히려 지참금을 들고 아버지에게 시집와야 했다. 그리고 형과 누나, 나를 낳았다.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발단은 사소한 것이었다. 누구의 주인 논에 먼저 물을 댈 것인가 하는 문제로 역시 소작농이었던 마을 이웃과 시비가 붙었다. 말싸움이 곧 주먹다짐이 되더니 그 사람이 홧김에 휘두른 곡괭이 자루에 아버지가 머리를 맞았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쓰러진 지 보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자기 땅 한 뼘도 없는 주제에 그까짓 주인 논에 겨우 물을 먼저 채우려다 남에게 얻어맞고는, 보잘것없는 소작농으로서의 인생을 그렇게 허무하게 마감했다. 다섯 살의 나는 그래서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그 후 닥치는 대로 일했다. 네 식구가 어떻게든 먹고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산에서 고사리, 쑥, 달래 따위를 캐서 읍내 오일장에 내다팔기도 하고, 나무를 베어 장작으로 만들어 이웃 마을을 돌기도 했다. 그러나 홀몸으로 자식 셋을 건사하기 버거웠던 어머니는 결국 1944년, 같은 마을의 유 씨 아저씨에게 재가를 했다.


유 씨 아저씨의 본처本妻는 병으로 죽고, 둘째 부인은 아이를 낳지 못했다. 어머니는 유 씨 아저씨의 셋째 부인이 되어 아들 둘을 내리 낳았다. 그래서 내게는 이부異父동생이 둘 생겼다. 끼니 걱정은 줄었으나 입으로 들어오는 것은 전보다 더 거칠었다.


SE-889ec732-92fd-4905-9201-8ec2e47375d7.jpg?type=w1600 1972년(임자년) 어머니 회갑연. 앞으로 이야기할 큰일들을 몇 차례 치르고 난 뒤의 모습이다.


1949년이 되자 국민학교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다. 1938년생인 내가 열두 살 되던 해였다.


알고 보니 출생 신고가 여러 해 늦어졌던 탓이라고 했다. 당시 촌村에서는 그랬다. 아이가 태어나도 정확한 출생 신고를 하기 어려웠다. 길에서 만난 누군가가 면面사무소에 간다고 하면 그 인편人便에 부탁하는 것이 그저 일상적인 것이었다.


자네, 면에 가는가? 그러면 우리 아들 호적 좀 실어주게. 3월 5일 아침 7시에 태어났네. 이름은 똥개로 헐라네. 부탁 좀 함세.


하지만 부탁받은 사람이 어쩌다 5월 3일 저녁 7시로 기억하거나, 심지어 이름을 개똥으로 헷갈리거나, 하물며 막걸리 한잔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이라도 벌어지게 되면, 그 이후는 상상에 맡길 일이다.


어쨌든 국민학생이 되었지만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니기는 어려웠다. 재가再家를 했어도 어머니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게 딸려있는 입만 셋이었다. 우리는 밥값을 해야 했다.


유씨네 허드렛일이 모두 우리에게 주어졌다. 나는 새벽동이 트기 전, 남보다 먼저 배낭 골에 가서 쇠꼴을 한 아름 베어야 했고, 아침 무렵엔 쇠죽을 미리 끓여두어야 했다. 이놈의 소 새끼 때문에, 너 때문에 내가 학교에 못 간다 싶어 애먼 소 엉덩이에 불이 자주도 났다.


해가 중천에 뜬 다음에야 늦게라도 학교에 갈라치면 미처 준비 못한 월사금이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학교에 가봤자 교실에 들어가지도 못할 텐데 차라리 논두렁에서 기다렸다가 아이들에게서 동냥 수업이나 해야겠다. 보리밥 뭉치를 건네주고 친구들로부터 그 날의 수업을 전해 듣는, 그것이 나의 여덟 살 일상이었다.


SE-bf8d31fa-9b1f-4373-985f-f2472aeeb455.jpg?type=w1600 1955년 2월, 대서 국민학교 졸업식. 맨 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나.


1955년, 국민학교를 졸업했지만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가방을 메고 신작로로 등교하는 아이들과 행여 마주칠까 봐 지게를 진 채 나무 뒤에서 한참을 숨어있기도 했다. 나는 중학교에 가는 친구들이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밤마다 부엌에서 몰래 흐느끼는 어머니의 울음을 들을 때면 배움과 진학에 대한 욕심을 꾹꾹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조카 준택이가 마을에 공민 학교를 열었다.


준택이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촌수로는 내가 삼촌이었다. 부산 동아대학교를 다니던 준택이가 나처럼 가정 형편으로 진학을 못했거나, 여자라는 이유로 애당초 까막눈이었던 사람들을 모아 마을 집회소에서 야학을 연 것이다.


공부가 늘 고팠던 내게 야학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스무 살이 넘은 집안 조카에서부터 역시 나보다 촌수가 높았던 열 살짜리 고모에 이르기까지, 대략 서른 명이 넘는 학생들이 논밭 일과 길쌈을 모두 마친 밤중에 모여서 대낮보다 밝은 호롱불을 켜고 공부를 했다. 내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가장 신나는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준택이와 친구들은 1956년부터 1962년까지 일곱 해 동안 공민학교를 운영했고 수업 과목은 한글, 한자, 영어, 국사 등이었다. 영어는 달랑 일주일만 배웠다. 영어를 담당했던 준택이 친구 놈이 도망갔기 때문이다. 도망간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마지막 2년은 나도 급장 자격으로 동네 조무래기들에게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집안 삼촌들이 날더러 선생님이라 부르니 나도 모르게 한동안 우쭐했던 것이 기억난다.


SE-9a9ece31-07c7-4f69-9d4b-98a1db6a0ef8.jpg?type=w1600 1957년 연죽 공민학교 수료식. 가운뎃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나.


스물여섯 살이 되자 동네에 중매쟁이들이 설쳤다.


중매쟁이가 결혼 적령기의 총각을 찾아와 몇 장의 사진을 보여주며 처녀들의 집안 설명을 하고 나면, 그중에 서로 조건이 맞고 적당하겠다 싶은 처녀를 선택해서 총각이 직접 만나러 가는 식이었다. 나이를 감안하면 나의 결혼은 꽤 늦은 편이었는데, 그것은 당연히 보잘것없는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었는데 결혼은 언감생심.


SE-3e1911e4-8a58-4359-b78d-985e7b490342.jpg?type=w1600 물방울무늬 저고리의 열여덟 살 아내. 운동회 구경 가는 길이라고 한다.


중매쟁이가 꺼낸 사진 중에서 대략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바닷가 마을에 산다는 아가씨의 얼굴이 유독 내 눈에 들어왔다. 자기 배를 가진 선주의 오 남매 중 막내딸이라고 했다. 중매쟁이가 날더러 여자 보는 눈이 있다며 침을 튀겼다.


이튿날 나는 중매쟁이와 그 마을을 찾아갔다. 사진 속 처자는 아랫방에서 베를 짜고 있었다. 바닷가에 산다 해서 까무잡잡할 줄 알았는데 곱디고운 하얀 얼굴이 그저 내 눈에 좋았다.


세 오빠들이 먼저 나서서 나의 이것저것을 물었다. 그 날, 어느 정도 허풍도 없지 않았음을 솔직히 인정한다.


누구보다도 둘째 오빠가 나를 좋게 본 듯했다. 오빠들로부터 허락이 떨어지니, 이제는 아가씨 차례였다. 그때의 결혼 신청은 “같이 사진 찍으러 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그러자는 답을 들으면 결혼 승낙이요, 싫다 하면 그것으로 파장이었다. 다행히 처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네, 그렇게 합시다 답을 했다. 아내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그날 오후, 장인 장모 될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최종 허락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두 분이 나의 무엇을 보고 결혼을 허락했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아마도 중매쟁이의 농간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혼례식 날, 아내는 가마를 세 번이나 갈아타는 수고 끝에 우리 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내가 가마에서 내리기도 전에 난리가 났다. 좁아터진 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차니 약하디 약한 돌담이 뒤로 무너진 것이었다. 경사스러운 날에 재수 없는 일이 생겼다고 아내 쪽 친척들이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중매쟁이의 말과는 달리, 다 쓰러져가는 초가에 제 땅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비렁뱅이라며 엉터리 결혼은 할 수 없다는 말까지 오간 다음, 결국 양가 하객들끼리 말싸움과 주먹다짐까지 벌어졌다.


그래도 어찌어찌 우여곡절 끝에 혼례를 겨우 마쳤다. 지금도 그 날만 생각하면 식은땀이 흐른다.


SE-9ff1280b-2d1c-4208-b8a6-8907a663d08f.jpg?type=w1600 우여곡절 끝에 치른 혼례식. 1964년.


혼례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내가 김씨네 논일을 해 주고 소작료로 받은 보리 한 가마를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이었다.


나는 먹거리가 생겼다는 생각에 한길에서부터 싱글벙글했는데, 그것을 새댁 한복 차림의 아내가 마당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보리를 뒤채에 내려놓으니 갑자기 부엌에서 통곡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는 당황할 뿐이었다. 한참 만에 아내가 퉁퉁 부은 눈으로 나오더니 내 손을 꽉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내 처지, 우리 형편이 어떤 것인지 알겠어요. 기울어져가는 초가에 소작으로 받은 보리 한 가마가 전부인 이런 집에 내가 시집을 왔군요. 잘 알겠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이 집안을 일으킬 것입니다. 반드시.


솔직히 아내의 다짐을 그때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열심히 살자는 뜻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EC%B2%AB%EC%B2%98%EA%B0%80%EB%82%98%EB%93%A4%EC%9D%B4.jpg?type=w1600 1964년 첫 처가 나들이 길


이듬해인 1965년에 딸아이가 태어났다. 가족이 늘어서인지 나는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남의 집 일을 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베를 짜고 길쌈을 하고 남의 집 밭일을 거들었다. 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뜻밖에 징집영장이 나왔다. 내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면 사무소를 찾아가서 극빈자이므로 입영 면제 대상이 아니냐고 따져 물었더니 그 혜택은 한 집에 한 사람, 그리고 장자長子인 형님께만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징집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1966년 4월, 나는 아내와 딸, 그리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고향집에 남겨두고 스물여덟의 나이에 논산 훈련소에 입대했다.


힘들었던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던 첫날, 전입 신고를 하려는데 중대장이 다짜고짜 내 뺨을 올려붙였다. 왜 그렇게 늙어 보이냐며 내 나이를 묻는 것이었다. 스, 스물여덟입니다. 그 말에 중대장이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다. 뒤에 안 일이지만 중대장은 스물다섯이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나를 마주칠 때마다 공연히 미안해하던 중대장은, 나를 사단장 관사 관리병으로 파견 보냈다. 머리도 기르고 사복을 입으며 좋은 식사에, 그야말로 풀린 군번이 된 것이었다. 내가 모셨던 사단장은 정순민 소장님인데, 후일 부산문화방송 사장까지 역임하셨다.


SE-06fcb827-b090-4fa2-bee0-d83dc43ea1e2.jpg?type=w1600 월남 파병 현지 환영식의 정순민 장군 (사진출처 : 국가기록원)


일병을 달고 첫 휴가를 나왔다.


아내와 어머니는 눈물로 나를 맞았다. 그동안 딸은 제법 말이 늘었다. 고생하는 어머니와 아내를 보니 얼른 군 복무를 마치고 빨리 돌아와 집안을 건사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이후 두어 번 더 휴가를 받아 고향을 다녀갔다. 내가 기혼에다 딸까지 있는 것을 알았던 사단장 사모님께서 특별 휴가를 여러 번 배려해 주셨다. 한 달짜리 상병 휴가를 마치고 부대 복귀를 하니 정순민 장군은 월남 파병 사단장으로 떠나고 관사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나머지 기간을 방첩대에서 보내고 1969년 4월에 제대했다.


SE-397cca6d-a71f-4f1e-8722-9aa747315a46.jpg?type=w1600 1966년 첫 휴가 때 딸과 아내와 함께


전역하자마자 그 해 5월에 갑자기 딸이 뇌수막염에 걸려 생사를 오가는 일이 있었다. 다행히 상가商家 마을 의사인 꼽추 할배의 긴급한 진료로 큰 위기를 넘겼다. 여덟 달 만에 태어난 딸은 그래서 잔병치레가 잦았다. 그리고 곧이어 6월에 아들이 태어났다. 아들의 이름을 상병이라 지을 뻔했다. 그 휴가 때 생긴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들의 백일을 며칠 앞두고 나는 부산으로 돈을 벌러 가기로 했다. 사단장 관사에서 생활하는 동안, 흔히 말하는 대로 사회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잘 입고, 잘 먹었고, 잘 썼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돈이었다.


내가 아무리 고향에서 마을을 지키며 뼈 빠지게 일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끼니 해결인 것이지, 이대로 산다면 나의 아들, 그리고 그 아들까지 나처럼 소작농 신세를 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손가락질받더라도 잠시 고향을 떠나 돈을 벌어오자. 그리고 내 땅을 사자. 내 땅에 벼도 심고 보리도 심고 그렇게 부자가 되자. 이런 결심에 이르자 나의 판단은 더 빨라졌다.


그런데 그 아들이, 우리 땅도 밟아보기 전에 그만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얼라는 다시 낳으면 되지 않갔나. 우선은 너래 살아야지. 힘내라이. 우리가 도와줄 테니.


용길 형님은 친형보다 더 나를 챙겨주었다. 두 형님의 격려에 나는 다시금 의지를 다졌다. 아들아, 두고 봐라. 이 아버지가 꼭, 반드시.


다시금 정신없이 바쁜 날들이 시작되었다. 나는 밤낮없이 일했다. 용길 형님과 만종 형님을 따라 마산, 진주, 광주, 대구까지 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다녔다. 그렇게 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SE-d2894e85-08ba-454b-bc88-8106b54bb200.jpg?type=w1600 맨 왼쪽이 만종 형님, 오른쪽 끝이 용길 형님, 그 옆이 나. 동료들과 통도사 나들이. 1979년 경.


일을 마치고 지친 걸음으로 전포동 집안으로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마당에서 빨래를 걷던 주인집 어머니가 뜬금없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앞선 인사를 했다.


막내 아범이래, 오늘 반가운 손님이 왔지. 뉜지 보라.


반가운 손님? 누구지? 하려는데 쪽마루 끝에서 여자 아이 하나가 와~ 하며 내게 달려왔다. 그리고 그 뒤로 나풀거리는 무명 치마저고리가 보였다.


아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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