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부, 그 지독한 생채기
아들이 죽었다는 기별을 받고 서둘러 고향을 다녀온 지 정확히 한 달 보름이 되던 1970년 5월 20일 저녁이었다. 딸을 앞세운 아내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우리 모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 양반 안사람입니더. 아주버님들도 저희에게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아실 낍니더. 저는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낍니더. 죽은 자식 묻힌 땅을 두 번 다시 밟지 않을 거란 말입니더. 이제는 살아도 여기서 살고, 죽어도 여기서 죽을 낍니더.
아내의 말은 그것이 전부였다. 첫날밤, 아내와 딸은 주인집 어머니와 함께 잤다.
그러나 아주버님이라는 낯선 호칭을 포함해서 이런 상황을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용길 형님과 만종 형님은 그 이튿날 현장에도 나가지 않고 루핑 집 마당으로 나무와 벽돌 따위의 자재를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나는 두 형님이 시키는 대로 그것들을 자르고 못질하고 쌓고 또 발랐다. 그러자 저녁달이 뜨기도 전에 두 사람이 넉넉히 누울 만한 문간방 하나가 뚝딱 만들어졌다. 밤새 두 분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더니 그런 계획을 세운 듯했다.
저녁상을 치우고 용길 형님이 주인집 어머니를 불러 앉혔다.
어머이, 내 이적 살면서리 언나 데린 아즈마이 이래 독한 사람, 당최 본 적이 없었거등요. 우리 셋이 살던 저 방, 막내 가족 줘 뻐리고 만종이랑 나랑은 이 문간방에 살겠스이 보증금 2만원에 다달이 만원씩 드릴 거래요.
주인집 어머니는 형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사래부터 쳤다.
너희들이 재료 가져와서 너희들이 만들었으니 그냥 살라는 거였다. 결국 용길 형님과 어머니의 실랑이 끝에 보증금 없이 땅값 명목의 월세 5천 원을 드리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형님들과 나는 내친김에 주인집 구석구석을 수리했다. 주인집 어머니는 막내 아범 안사람이 오니 자기가 덕을 본다며 좋아라 했다.
이제야 우리 방이다 싶었던지 아내가 이틀 만에 겨우 보따리를 풀었다.
이불 한 채, 베개 두 개, 냄비 두 개, 밥통 두 개, 수저 한 벌, 그리고 여름옷 한 벌. 그것이 고향을 떠나온 아내의 각오를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주인집 어머니와 형님들 앞에선 곧잘 웃기도 하고 말도 잘하던 아내가, 내 앞에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내게 할 말이 있을 때는 여섯 살 난 딸아이를 거쳤다.
아내의 깊은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나도 그것에 대해 별다른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돈 벌러 도시로 나간 무심한 남편 때문에 금쪽같은 자식을 그 흔하디 흔한 주사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그 아픔이 아내의 무언의 시위를 통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주인집 어머니와 부엌을 같이 쓰면서 아내가 아침저녁밥을 도맡았다. 형님들과 나는 새벽밥을 먹고 일터로 나갔다. 텁텁한 식당밥은 저만치 꺼지라며 만종 형님은 아내에 대한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전보다 더 미친 듯이 일했다.
아내는 전포동 시장에서 낡은 재봉틀을 오백 원에 사 왔다. 고향 마을에서도 베를 잘 짜기로 유명했던 아내는, 주인집 어머니가 받아온 옷 수선을 시작했다. 서면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들 사이에서 아내의 바느질 솜씨는 금방 소문이 났다.
이 에미나이, 인간 미싱이래 인간 미싱이야.
주인집 어머니는 아내 덕에 전포동 바느질 할매라는 별명을 얻었다.
주인집 어머니는 아내를 딸처럼, 며느리처럼 아껴주셨다. 물론 아내가 바느질 삯에서 꼬박꼬박 얼마간을 떼어 드린 이유도 있었지만, 주인집 어머니 역시 월남할 때 아내 또래의 큰 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뒤늦게야 알았다. 아내가 바느질에 여념이 없을 때에는 주인집 어머니의 막내딸 혜자가 우리 딸을 돌보았다.
여름에 이어 가을이 지나고 또 겨울이 갔다. 그리고 새 봄이 시작되었다.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던 우리에게도 조금씩 조금씩 희망이라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가난이 싫어 무작정 떠나온 고향, 고마운 은인들과의 만남, 뜻하지 않은 아들의 죽음, 예상치 못했던 아내의 부산행, 그리고 새로운 시작. 바라고 바라던 행복이 머지않은 듯했다. 돈을 벌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땅을 살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못 가졌던 내 땅을 살 것이다. 그렇게 부풀어 오르는 나의 희망처럼 아내의 배도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워메, 참말로 신기허당께. 내외지간에 말도 한마디 안 섞음시롱 애기는 워찌코롬 만들었을까잉.
만종 형님의 헛헛한 놀림도 1971년 그 여름의 무더위를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입추를 지난 지 한참이었지만 8월 늦더위의 기세는 여전히 꺾일 줄 몰랐다. 더구나 단열이 안 되는 루핑 지붕 아래서 가쁜 숨을 내쉬며 손으로 재봉틀을 돌리던 아내의 두 볼은 이미 익을 대로 익어 있었다.
막내 아범, 오늘은 일 아이 갔으면 좋겠구마. 내 보이까니 오늘내일 간나래 나오지 싶은데.
주인집 어머니가 근심 섞인 표정으로 방안을 기웃거리며 말했다. 벌써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이 말이 맞어. 동생은 오늘 하루 쉬는 게 좋갔는디.
용길 형님도 걱정이 다분했다.
하지만 나 하나 빠지면 다른 사람을 돈 주고 써야 했다. 내게 돌아올 그 돈이 남에게 간다는 것이 사실 아까웠다. 다행히 현장이 집에서 멀지 않으니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점심 먹는 식당으로 연락을 주십사 당부하고 대문 앞에서 머뭇거리던 형님들의 등을 오히려 내가 떠밀었다.
오늘만은 일하러 가지 말라는 그 말, 나는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