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추억 (4)

생사의 기로

by 진우


내가 서른두 살, 아내 스물여섯에 첫아들을 낳았다.


땅을 살 돈을 벌기 위해 내가 부산으로 가 있던 어느 날, 아들은 홍역을 심하게 앓았다. 읍내 병원에 아들을 데려가겠다고 했으나 삶의 경험이 지혜의 전부였던 고지식한 어머니는, 돈타령을 하며 욕설로 아내를 주저앉혔다. 상태가 심각해지자 아내는 아들을 둘러업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밤길 이십 리를 내달렸다.


찢어지고 갈라진 맨발로 가까스로 읍내에 도착했을 때 병원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잠에서 깬 의사 앞에 아들을 내려놓았지만 아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울고 불며 매달리는 아내의 마지막 소원이란 말에 의사는 마지못해 죽은 아들에게 주사를 놓았다. 그러나 이미 굳어버린 몸에 바늘이 들어갈 리 없었다. 퍼렇게 식어버린 아들을 업고 아내는 다시 그 밤길을 되짚어 걸었다. 무식한 미친년이 제 아들을 죽였다는, 아내의 울부짖는 소리가 쏟아지는 비에 묻히던 밤이었다.


뒷산 배낭골에 아들을 묻고 돌무덤을 만들었다. 철 모르는 다섯 살배기 딸은 돌무덤을 맴돌며 춤을 추고, 정신 줄을 놓은 아내는 매일 피를 토하며 울었다. 진달래가 흐드러진 들밭에 널브러졌던 아내는, 내가 다녀가는 것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던 아내가 보따리를 싸서 딸을 앞세우고 부산 전포동 루핑 집 마당에 나타난 것이 벌써 일 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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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선 좀처럼 말이 없던 아내가 며칠 전 느닷없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큰길 여기에 산부인과가 있고, 여기에 소아과가 있고, 이만 치에 산파가 살고, 여기쯤에 굿 잘하는 무당이 있소.


아내의 염려를 나는 알 수 있었다. 발이 닿는 곳에, 눈이 가는 곳에 반드시 병원이 있어야 했다. 종이를 받아 들고 머뭇거리는데 아내는 말없이 재봉틀을 끌어당겼다.


모두가 만류하는 출근길이었지만 눈 앞의 돈을 남에게 거저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무거운 마음으로 일을 했다. 그러던 중 오후 새참을 기다리는 식당 안으로 주인집 막내딸 혜자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놀란 형님들이 벌떡 일어섰다


혜자야, 무슨 일, 무슨 일 일어난 거이니.

먼 일 나부렀냐? 어따, 혜자야잉, 궁금헝께 싸게싸게 말 좀 혀부러라잉.


혜자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겨우 말을 뱉었다.


아랫방 아지매가, 아랫방 새댁이 아지매가 얼라를 낳았습니더. 아들입니더, 아들.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저녁 길에 용길 형님이 쇠고기 두 근을 끊고, 만종 형님이 미역 한 다발을 안았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주인집 어머니가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우리를 반겼다.


막내 아범아, 너네 간나를 내가 받았디. 너네 각시래 저승 두어 번 갔다 왔을 끼야. 얼라 대그빡이 이만해서리. 욕봤디, 암, 욕봤구말구.


만종 형님이 마당을 돌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따, 내 새끼도 아닌디 나가 왜 일케 기분이 좋아번지냐? 용기리 성님, 성님두 일루 후딱 오쇼잉. 이 좋은 날에 춤이라도 춰야허지 않겄소? 엄니도 일로 오쇼잉. 오늘 동네 잔치 허장께. 나가 오늘 술도 받고 고기도 받고 싹 다 헐 것잉께. 동네 사람들 다 불러 번지쇼잉.


문틀에 기대앉아 가쁜 숨을 덮어가던 아내가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아내의 웃는 얼굴은 근 몇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았다. 옆으로 놓인 포대기 안에서 뽀얀 핏덩이가 쌔근쌔근 잠을 자고 있었다. 그지없이 무덥던 그 여름의 끝자락, 전포동 루핑 집 아랫방에서 나의 둘째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1971년 양력 8월 20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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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는 일상이 다시 계속되었다.


도시 개발 열풍에 따라 우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아내와 주인집 어머니는 받아온 바느질 감을 날짜에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다. 볼살이 제법 오른 아들은 혜자의 등에 업혀 잘 크는 듯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말이다.


아들이 태어난 지 삼칠일(스물 하루)이 지날 무렵이었다. 전포동 복개천 공사 현장으로 뜻밖에, 아내가 아들을 업고 왔다. 오전 새참을 먹은 직후였다. 아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얼라가 아픕니더.


등에 업힌 아들의 볼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엊저녁만 해도 멀쩡했었다.


보기에 감기 같은데. 병원은 가봤나. 의사는 머라 하더노?

잘 모르겠답니더.


아내는 이미 병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용길 형님의 허락을 받고 그 날 오후 아내와 함께 서면 김태인 소아과를 찾았다. 아들은 아내의 품에서 여전히 밭은 숨을 내쉬었다. 진찰을 마친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기 아부지, 큰 병원에 함 가보이소. 이거는 작은 병원에서 진찰할 병이 아니네예.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병이라니. 큰 병원이라니. 아내가 하얗게 질려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곧장 춘해 병원 응급실로 갔다. 저녁 무렵이 되어 겨우 끝난 진료의 결과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슨 병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내는 병원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이 우리를 흘깃 쳐다보았다.


뭐 보능교? 사람 우는 거 처음 보능교! 울지 마라. 이런 돌팔이 새끼들이, 이 꼬라지로 진찰하믄서 돈 받아 처묵나? 얼라 병도 못 알아내는 것들이 무신 의사고? 일어나라. 다른 병원에 가 보자.




이튿날, 새벽부터 기다려 진찰을 받았던 적십자 병원의 의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아기 보호자님. 서울의 큰 병원에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요, 거기 가면 나을 수 있겠습니꺼? 아니, 무슨 병인지라도 알 수 있겠습니꺼?


의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스무 곳이 넘는 병원을 전전하는 동안 일주일이 금방 지나갔다. 아들의 병명조차 속 시원히 말해 주는 병원이 없었다. 글쎄요. 다른 병원에. 큰 병원에. 우리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들은 눈에 띄게 야위기 시작했다. 젖을 빨지 못했고, 어쩌다 물이라도 먹이면 전부 토해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헐떡이다가 고쳐 업으면 또다시 혼자 힘에 겨워 자지러지기를 반복했다.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그리고 제대로 울지 못하니 열흘이 지날 무렵엔 뼈만 앙상하게 남은 흉한 꼴이 되어 버렸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름쯤 지났을 어느 오후, 메리놀 병원 복도에서 내가 건넨 우유를 받아 들고 아내가 힘겹게 말했다.


있잖아예, 우리, 거기라도 가 볼랍니꺼?

어데?

무당집에요.


나는 즉시 답을 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나는 바하이교라는 종교를 믿고 있었다.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으나 공사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가끔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노래하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무당이라니. 순간 망설여졌다. 그러나 아내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아내는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간절함이었겠으나, 그깟 무당이 알면 뭘 알겠어.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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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게 눈이 찢어진 할매가 아들을 조심스레 받았다.


무당 할매의 손이 닿을 때마다 아들은 또 뒤로 목을 젖히며 헉헉거렸다. 눈을 감고 아들을 조심스레 어루만지던 할매가 갑자기 내게 쏘아붙였다.


니가 애비가? 니가 사람이가? 이거는 병이 아닌 기라. 이거는 장군님이 노한 기라. 애비 니, 저질렀제? 솔직히 말해라.

예? 저지르다니요?

니, 해서는 안될 몹쓸 짓을 했나, 안 했나 그 말이다. (註. 저지르다 : 터부taboo를 깨다. 금기를 어기다)


해서는 안될 몹쓸 짓?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모두가 출근을 만류하던 그 날이었다. 그 날은 우리가 지은 집의 대들보를 올리는 상량식上樑式이 있었다. 돈 많은 집주인이 돈 자랑도 할 겸 잔칫상 차린다며 엄청나게 큰 돼지를 끌고 왔다.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끌려온 돼지가 뒷마당에서 죽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그 갈라진 배 사이로 펄떡이는 심장이 꺼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삶긴 고기를 사람들과 나눠먹었다.


간나 낳을 달月에는 머이든 조심해야 하는 거이디. 험한 것도 보면 아이 되구, 못난 것도 보면 아이 된다. 알갔니 막내 아범.


주인집 어머니의 지청구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럴 리 없다. 그건 미신일 뿐이다. 절대로 그럴 리 없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적 없습니더. 절대 없습니더.


여전히 미심쩍은 눈치의 무당은, 그래도 굿을 하면 장군님의 노여움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굿값이 30만 원이라고 했다. 쌀 한 말에 1만 6천 원, 내 일당이 7백 원이던 시절이었다. 죽기 살기로 일했으니 모아둔 것이 얼마간 있긴 했지만 턱없이 모자랐으며, 아무리 작은 돈이라 한들 그깟 굿 따위에 덜컥 써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내는 그날부터 앓아누웠다. 그것은 아내가 곧 죽어도 굿을 해야겠다는 고집의 표시임을 역시 나는 알고 있었다.


아따, 우리가 남이 아니랑께. 이건 그냥 주는 게 아니란 말이시. 용기리 성님이랑 반반 준비한 것잉께, 그냥 써부러. 아니 우덜이 동상마냥 마누라가 있나, 자식새끼가 있나? 그라고 누가 안당가? 굿해서 우리 아가가 팔팔허게 살아나믄, 그렇게 살아나믄, 동상이 우리 모른 척 할랑가? 죽을 때꺼정 우덜 업고 다니면 된당께. 우선 자식 새끼버텀 살리고 보자고잉.


비가 내려 일을 하루 쉬었던 저녁. 어금니를 깨물어가며 애써 울음을 참던 내 셔츠 속으로 만종 형님이 무언가 싸인 신문지 뭉치를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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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루핑 집 작은 마당에 큰 굿판이 차려졌다.


오방색 깃발이 달린 대나무가 서고, 멍석 옆으로 북과 꽹과리, 징을 든 굿쟁이들이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자리를 잡았다. 둘러쳐진 병풍 앞으로 굿상이 차려졌고, 시퍼렇게 날이 선 쌍 작두가 하늘을 향해 놓였다. 그리고 아들은 작두와 굿상 사이에 마치 제물처럼 놓였다. 이제는 울 힘조차 없어 보이는 아들이 그나마 남은 몇 숨을 어렵사리 토해내고 있었다.


워따, 니미랄. 장군님. 우리 아가 좀 지발 좀 살려주쇼잉. 이미 한나 델꼬 갔으면 됐잖소. 욕심도 참 많으시요. 머들라꼬 또 하나 저 아까븐 생명, 또 델꼬 갈라고 그라시요, 참말로 너무허시요잉! 에이 몹쓸 장군님아!


주인집 어머니와 아내, 혜자, 용길 형님과 만종 형님 그리고 동네 할매 몇몇은 구경 온 동네 사람들 앞에 서서 두 손을 지성으로 비비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 꼴이 보기 싫어 소주병을 들고 용길 형님의 문간방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무당의 굿이 시작되었다. 굿소리에 맞춰 징이 울고 북이 터졌다. 징징징 둥둥둥. 문틈으로 살며시 내다보았다. 칼춤을 추던 무당이 작두에 올라가면 아들의 숨이 돌아오고, 작두에서 내려오면 또다시 숨이 꺼져갔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소주를 병째 들이마시고 이불을 덮어썼다. 그러면 그럴수록 징과 북이 내 귀를, 내 심장을 후벼 팠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둥둥둥 징징징 쾡쾡쾡.


그렇게 시끌벅적하던 바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도 잦아들었다. 대신 아내의 통곡 소리가 마당을 갈랐다. 아이고, 아이고, 아가. 아이고. 나는 놀라서 이불을 훽 젖히고 마당으로 뛰쳐나갔다.


무당과 굿패거리가 사물을 챙기고 있었다. 굿이 끝난 것 같았다. 굿을 끝내기엔 너무 빠른 시간이었다. 취기가 오른 얼굴로 나는 무당의 소맷귀를 잡았다.


할매요, 굿 끝났습니꺼?


무당이 차갑게 내 손을 뿌리치며 낮은 목소리로 내깔았다.


얼라가 죽어 뿠는데 굿은 더해서 머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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