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추억 (5)

부활, 그리고 새로운 시작

by 진우


아들은 숨이 끊어졌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통곡을 하다가 혼절했고 깨어나 울다가 또다시 정신을 잃었다. 주인집 어머니가 아이고아이고 울면서 옷고름 물로 아내를 달랬다. 만종 형님은 무당 할매를 잡아 죽일 거라며 방방 뛰었다. 용길 형님이 동네 사람들을 서둘러 쫓아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내게 뜬금없이 허기가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제물祭物이 차려진 굿상을 향해 무릎걸음으로 기어가서 떡이며 과일이며 정신없이 집어먹기 시작했다. 아기 아빠마저 드디어 미쳐 버렸다며 마당에서 밀려나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멱살을 잡고 만류하는 만종 형님까지 뿌리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입에다 음식을 밀어 넣었다.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십여 분이나 지났을까? 갑자기 혜자가 소리쳤다.


아, 새댁이 아지매요. 얼라가 눈을 떴습니다. 얼라가 눈을 떴다고예!


그 날의 일을 우리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믿지 못한다.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며 코웃음을 친다. 숨이 멎어 죽었던 아이가 어떻게 살아날 수 있냐며, 소설 쓰지 말라고. 그러나 주인집 어머니는 아흔셋에 돌아가실 때까지, 그리고 만종 형님과 용길 형님은 지금도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무용담처럼 이 날을 회상하곤 한다.


내가 봤당께,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당께, 안 그라요 성님? 아따, 혜자야, 니가 증인이랑께.


내가 신神이 있음을 믿게 된 것도 이 날부터였다. 그러나 나의 게걸스러웠던 그 날의 허기에 대해선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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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에 미련을 두었던 것인지 아들은 기적적으로 숨을 이어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그렇다고 증세가 나아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며칠이 지나 겨우 정신을 수습한 아내와 함께 이번에는 부산대학병원을 찾아갔다. 인자한 외모의 의사가 아들을 진찰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어렵기는 하겠지만 한 번 도전해 보자. 세상에 고칠 수 없는 병은 없다. 아들을 고칠 수 있는 기계가 사흘 후면 병원에 도착한다.


그 말에 아내와 나는 드디어 희망이 생겼다며, 아들이 아프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대신, 입원 보증금으로 25만 원을 예치하라고 했다. 막막했지만 이번에는 주인집 어머니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살면서 은혜를 갚을 사람이 내겐 너무도 많았다.


보호자분, 아기 이름이 뭡니까? 접수처의 간호원이 우리에게 물었다. 네? 아기 이름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여태 아들의 이름도 짓지 않고 있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주인집 어머니가 용한 작명소를 알려주겠다 해서 그 말을 기다렸던 때문이었다. 아직 이름이 없습니더. 네, 알겠어요. 간호원이 무엇인가 적는 듯했다. 수속 서류에 또렷하게 적힌 아들의 이름 세 글자는, 임, 아, 기.




입원 수속을 마친 다음날 오후, 담당 의사는 나를 자기를 따라 어떤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니 임 아기를 내려놓고 나는 뒤에 서서 지켜보라는 것이었다. 곧 젊은 의사 십여 명이 들어왔다. 의사는 아들을 칠판 앞에 있는 철로 만든 탁자로 옮겼다. 차가운 탁자에 살이 닿으니 아들이 또 힘든 숨을 헐떡였다. 의사가 하는 말은 어려운 영어가 대부분이어서 내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희귀 병이니 어쩌니 했다. 젊은이들은 수시로 네 하고 대답을 했다.


알고 보니 그것은 진료가 아니라 인턴 의사들을 위한 수업이었던 것이다. 의사는 마치 개구리 다루듯 내 아들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팔을 비틀어 잡곤 했다. 그러기를 꼬박 세 시간. 아들은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듯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생울음을 토했다. 그것을 눈뜨고 지켜보기란 정말 힘들었다. 나는 참을 수 없었다.


선생님, 고마 하입시더. 안 되겠습니더.


젊은 의사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의사는 내게 나가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아들을 들어 안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기다리던 아내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말하지 않았다. 접수처로 가서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하니 보증금에서 5만 원을 공제한다고 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 아들은 살려도 내가 살리고, 죽여도 내가 죽인다. 그러나 내게 아들을 살릴 방법은, 사실 없었다.




용하다는 한의원이나 병원이 있다고 하면 시간과 거리를 따지지 않고 찾아갔다. 그러나 답은 한결같았다. 하루는 범내골 로터리의 김희상 소아과를 찾아갔을 때였다. 진찰을 마친 김 원장님이 조용히 내 손을 잡고 공손하게 말했다.


애기 아빠, 의사로서 할 소리는 아닙니다만 이 아이는 불치병입니다. 혹시 종교가 없어서 미신을 믿는다면 차라리 굿을 한 번 해 보십시오.


또 굿을 하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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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어느덧 8월 말을 향하고 있었다. 아들이 발병한 지도 한 달 반이 지났다.


나도 지칠 대로 지쳤으니 아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일곱 살 딸아이 역시 혜자가 돌봐주긴 했어도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곁에서 우리의 매일을 지켜보시던 주인집 어머니는 옷고름에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용길 형님과 만종 형님은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폐인처럼 방구석에 틀어박힌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거나 위로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치는 지경이 되었다.


그러던 중 친형이 찾아왔다. 형은 아내와 아들을 스윽 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가망 없다. 짐 싸라. 지금 네 꼬락서니를 함 봐라. 고향 버리고, 선산 버리고 부산 오더니 이 꼴 보여주려고 그랬더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얼라 죽으면 묻어줘라. 그게 차라리 나을 거다. 그리고 농사나 지어라.


마음속에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요, 내가 이 꼬락서니 되니 보기 좋소? 춤이라도 추지 그라요. 그러나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냥 이상하게도 순순히 형의 말을 따라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은 체념이었다.




결국 우리 부부는 일 년 반의 부산 전포동 생활을 마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땅을 살 돈을 마련해서 금방 돌아가겠노라 장담했던 나, 그리고 살아서는 두 번 다시 고향 땅을 밟지 않을 거라던 아내. 떠나올 때의 꿈과 잠시 느꼈던 희망 따위는 우리에게서 진작에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겨우 남은 것은, 죽기 직전의 아들과 마음까지 상처 입은 아내, 그리고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빚. 용길 형님과 만종 형님, 그리고 주인집 어머니를 제대로 볼 낯이 없어서 죄인처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그렇게 정들었던 루핑 집을 떠났다. 떠나올 때 그 보따리 하나가 돌아갈 때의 짐의 전부였다.


밤배를 타기 위해 충무동 선창가에 도착했다.


형님 몰래 형수가 이번에도 우리를 따라나섰다. 순서를 기다려 줄을 서 있는데 김밥 장사치 중 하나가 우연히 아들을 본 모양이었다.


아이고, 이게 짐승이가 사람이가.


그 말을 듣더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저마다 한 마디씩 뱉었다. 얼라가 병신인갑네. 아내는 그 말이 듣기 싫어 포대기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구경 났소? 저리 안 꺼지나. 죽고 싶나. 나는 막욕에 쌍욕을 더했다. 내 악다구니에 놀라 물러나던 장사치 중 하나가 그랬다.


하이고, 꼴에 애비라꼬 저런 거 편드나. 퍽이나 자랑스럽겠다.


우리가 탈 차례가 되었다. 검표원이 표를 받으려다 말고, 아내가 안고 있는 포대기를 슬쩍 보더니, 갑자기 배에 못 태워주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삼등석 표 석 장을 보여주며 표가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왜 안 되냐고 물었다. 검표원이 이죽거렸다.


아이고, 보소, 이 양반아. 알면서 그라능교. 이런 재수 없는 거 태웠다가 배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우짤라고. 좋은 말 할 때 퍼뜩 내리소.


그때였다. 옆에 섰던 형수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표원의 뺨을 올려붙였다. 처얼썩.


이런 개자식을 봤나. 이런 썩을 놈아. 뭐가 어쩌고 어째? 좋은 말 하지 말고 어데 나쁜 말 함 해봐라, 이 시불 놈아. 다시 한번 씨부리 봐라, 엉? 그러면서 형수가 허리춤에서 돈다발을 꺼내 검표원의 얼굴에다 집어던졌다.


또 퍼억 소리가 났다. 아놔, 받아라. 돈이다. 다 받아 처 묵고 제일 좋은 자리 내놔라, 이 자슥아. 난데없는 공격에 머쓱해진 검표원이 그제야 주위의 눈치를 살피다가 지폐 몇 장을 뽑은 다음 나머지를 조심스레 돌려주었다.


바뀐 우리의 자리는 일등석이었다. 딸아이를 재우고 아들을 옆에 눕혀 다독이는 동안, 식식거리며 김밥과 소주 한 병을 사 온 형수가 뒤늦게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리고는 곧 아내를 와락 끌어안더니 작정하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동서야. 우리 불쌍한 동서야. 미안타. 너거 시아지배(시아주버니)를 용서해라. 아이고.


내가 우리 형수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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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둣가에 도착하니 이미 날이 밝았다.


미리 기별을 받았는지 마을에서 택시를 보냈다. 고향집은 이미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는 마당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발버둥을 치고 있었고, 이부異父 동생 하나는 부산 형님의 연락을 받았다며 삽과 곡괭이를 챙겨 무덤 파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내는 몇 걸음 제대로 걷지 못하고 어머니 옆에 꿇어앉아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곡哭이 담장을 넘었다.


아이고, 자식 하나 죽인 것도 모자라서 또 하나를 죽여서 델꼬 왔나. 나는 못 산다. 나는 못 산다. 나도 데리고 가라. 죄 많은 나도 죽을란다.




오후가 되자 아들은 마지막 힘을 내려는지 또 돼지 우는 소리를 냈다.


구경하러 몰려든 동네 사람들에게 막내 동생이 참지 못하고 낫을 휘둘렀다. 어데 구경 났소, 빨리 가소. 한바탕 소동 끝에 사람들이 물러가고 텅 빈 마당에 곧 정적이 들어찼다. 어느 누구도 말이 없었다. 간간이 들리는 아들의 커억커억 소리가 그래도 아직은 목숨이 붙어 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 아직은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었을까. 그 힘겨운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아들 따라 저 세상 갈까 하는 못된 생각마저 들려던 참이었다.


계시능교?


대문간의 인기척에 다시 낫을 들고나갔던 동생이, 곧 머리가 허연 어떤 할머니와 함께 들어왔다.


행님요, 이 할매가 얼라 좀 보자 하는데요. 근데 할매요, 머할라꼬 그랍니까? 지금 여기 좋은 기분 아닙니데이.


낫을 든 동생의 엄포에 할매는, 건넛마을 너른골[평곡平谷]에서 왔다고 했다. 지난 사나흘 동안 꿈속에 계속 우리 마을이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침술사라며 이 집에 아픈 아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침이라도 놓아줄까 싶어 왔다고 했다. 어머니와 아내도 마침 아기의 묏자리를 보러 배낭골로 올라가고 없던 때였다.


동생과 나는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아들을 평곡 할매에게 안겨 주었다. 할매가 아들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 이리저리 보더니 여기저기 침을 놓는 것 같았다. 한 시간 즈음이나 지났을까? 평곡 할매가 한참 만에 몸을 일으켰다. 숨을 고르며 침구針具를 챙긴 평곡 할매가 우리에게 그랬다.


애기미(아기 엄마)가 오면 젖을 물려보소. 단박에 젖을 빨면 살아날 끼고, 아니면 정말로 오늘 밤에는 저 세상 보낼 운명이니까네.


젖? 젖을 빨았으면 애당초 이렇게 되지도 않았소. 삼칠일 이후로 아들은 아내의 젖을 한 번도 입에 물지 못했다. 입술에 겨우 적셔주는 물로 억지 연명을 해 왔는데 젖은 무슨 젖. 그냥 닥치고 빨리 가소, 돌팔이 할매! 하는 소리가 나오려 했다. 그래도 입으로는 고생했단 말을 하고 돌려보냈다..




저녁이 되자 배낭골에서 먼저 내려온 아랫 동생이 내게 귓속말로 땅을 다 파두었다고 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얼마나 울었던지 기력이 빠져버린 어머니 뒤로 아내가 휘청거리며 마당으로 들어왔다. 막내 동생이 오후에 있던 평곡 할매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동생에게 욕을 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 말을 듣고 서둘러 아들을 안고 아랫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마조마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그리고 가장 간절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잠시 후 아랫방에서 갑자기 아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내를 만난 이후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생전 처음 듣는 크고 우렁찬 소리였다.


어, 어무이요. 얼라가 젖을 빱니더. 어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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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아들을 안고 평곡 할매를 찾아갔다.


부엌에서 밥을 짓던 할매가 우리를 알아보고 반겼다. 할매는 한사코 내가 내민 돈을 거절했다. 자신은 이제 편하게 잘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밤마다 꿈에 보이던 사내아이가 다행히 어젯밤부터는 오지 않는다고, 그걸로 됐다고 했다.


그 말을 알아차린 아내가 평곡 할매 앞에 엎드려 또 오열했다. 평곡 할매는 집을 나오는 우리에게 또 신신당부했다. 아들이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잔병치레가 많을 테니 절대 미리 걱정도 말고 그렇다고 아예 마음도 놓지 말라고.


평곡 할매는 그 후 일주일 뒤 세상을 떠나셨다. 주무시던 중에 운명하셨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평곡 할매의 장례식장에 사흘을 머물렀다.




고향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들은 젖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두어 달 동안 참았던 아들의 식탐이 대단했다. 아내가 젖몸살을 할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다시 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들 못지않게 어느 정도 기운을 회복한 아내와 나는, 고향으로 돌아간 지 한 달 만에 다시 또 한 번 부산행을 결심했다. 문자 그대로 이번에는 야반도주夜半逃走였다.


어머니가 잠든 초저녁 틈을 타서 막내 동생이 (먼저 부산에 터를 잡으면 자기를 부르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 미리 대절해 둔 택시를 타고 노량 선착장으로 갔다. 이전에 면박을 주었던 검표원이 우리를 알아보고 움찔했다. 역시 변함없는 삼등석이었지만 이번엔 아무런 문제 없이 배에 오를 수 있었다.


밤바다를 서둘렀던 배 덕분에 우리 네 식구가 전포동 루핑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이 막 밝았다.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딸아이가 먼저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갔다. 혜자 언니야~ 그 말 꼬리를 끊기도 전에 아니, 이 간나들 보라이? 하며 주인집 어머니가 맨발로 달려 나오고 있었다.


1971년 양력 11월 18일 아침이었다.


SE-9845b6c6-4fd1-4c23-b208-e36d6707e66b.jpg?type=w1600 1972년 4월 범어사. 그렇게 고우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많이 상했다. 모두 나 때문이다.


아들은 실제로 세 살이 될 때까지 걸음마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단(유아성 대상포진)이 자주 와서 이후로도 우리 부부의 속을 여러 번 태웠다.


그러나


아들이 살아있어 준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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