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우 Jun 24. 2021

고칠 수 없는 글

< 작당모의(作黨謨議) 1차 문제(文題) : 교정 >


   부산釜山을 다녀오는 일정은 언제나 빠듯하다. 출장이니까 원래 목적에 맞게 일도 해야 되고, 짬을 내어 고향 친구도 만나야 하며, 그리고 연로年老하신 부모님도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삼월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투자 계약을 마무리 지었고, 대학 친구를 만나 커피를 마셨으며, 두 분을 모시고 점심 식사를 한 다음, 본가本家로 돌아왔다. 틈틈이 기차 출발 시각을 확인해 가며 내 방에서 짐을 챙기고 있었다.


   똑똑.


   집 안에서 노크할 사람은 유일했다. 엄마, 들어오세요. 천천히 문을 열고 빼꼼히 안을 들여다보는 엄마의 첫마디는 언제나 똑같다. “안 바쁘나? 들어가도 되나?” 대답 대신 엄마가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당겨 드렸다. 몇 해 전 무릎 연골 수술을 받은 탓에 맨바닥에 앉고 일어설 때면 엄마는 아직도 불편함을 느다.


   트렁크 옆에 챙겨둔 옷가지를 공연히 만지작거리는 엄마는 분명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일 있어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엄마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그러면서 엄마는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그것은 반으로 접힌 종이 뭉치였다. 받아서 펼쳐 보니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은, 그저 흔한 원고지였다. 그런데 눌린 글씨 자국이 또렷이 보였다. 혹시나 싶어 종이를 뒤집었다. 그러자 원고지 뒷면에는 너무도 익숙한, 낯익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표정을 살피던 엄마가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곧 내게 물었다.


   “이것도 혹시 책으로 만들 수 있나?”


   책이요? 조금은 뜬금없는 말이었다. 책으로 만들 수 있나. 아아, 이를 어쩐다? 금세 난처해졌다. 책이 문제가 아니었다. 원고지 뒷면에 가득한 엄마의 글씨를 보는 순간부터 나는 내 감정이 어방향으로 달려갈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난처했던 것이다. 특별한 게 아니라더니.


   손에 든 원고지를 이리저리 돌려 보고 넘겨보는 척했다. '아들이 아팠다, 고향을 떠났다, 남편을 기다렸다......' 애써 피하려는 눈길에 어쩌다 얻어걸린 서너 줄 만으로도 목이 턱 메었다. 무조건 참을 거라고 속으로 다짐부터 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서부터 무언가가 올라왔다. 눈앞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엄마가 내 등을 토닥거렸다. 그 바람에 결국 눈물 한 방울이 종이 위에 툭 떨어졌다.


   “와 우노? 그라믄 엄마가 미안하다 아이가.”


   엄마는 글씨만으로도 사람을 울리는 묘한 재주를 가졌다. 아무래도 기차 출발 시각을 변경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엄마 인생의 최대 목표, 다시 말해 엄마의 절대 소원은 우리 삼 남매를 대학에 보내는 것이었다.


   가난과 무지無知 때문에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아들 하나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야반도주夜半逃走하듯 고향을 떠난 부모님은, 번지수番地數조차 제대로 없는 언덕배기 달동네에서 도회지 살림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건설 현장의 막노동꾼으로, 엄마는 삯바느질부터 남의 집 식모살이에 이르기까지 마른일 궂은일을 가리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 나이 서른두 살, 엄마는 스물여덟이었다. 어쩌면 당신들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야 할 시간을 땀과 눈물로 오롯이 채웠던 것이다. 두 분이 갖은 고생을 감내했던 것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자식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었다.


   "가난한 것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제대로만 배우면 가난을 떨쳐버릴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내 자식들만큼은 가난하게 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대학에 보내야 한다."


   1971년, 보증금 1만 5천 원에 월세 7백 원이던 루핑 Roofing 집 셋방살이 형편에서 대학이란, 꿈조차 꿀 수 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부모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곧, 하루도 쉬지 않고 죽기 살기로 일을 했다는 것이다. 힘에 부칠 때면 그래도 웃는 얼굴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엄마 소원은 너희 셋 모두 대학생이 되는 것이라고. 뼈를 갈아서라도 뒷바라지를 할 테니 너희들은 그저 공부만 하면 된다고.


   다행히도 우리 삼 남매는 공부를 곧잘 했다. 아버지의 일터를 따라 국민(초등)학교를 일곱 번이나 전학해야 했던 누나도, 체구는 작았지만 자존심만 시퍼렇게 살았던 나도, 승부 근성 하나만큼은 삼 남매 중 으뜸인 여동생까지도 결석 한 번 없이 우등상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고, 엄마의 소원대로 모두 대학에 합격했다. 우리는 학원을 다닌 적도 없었고, 흔한 과외 수업 한 번 받은 적도 없었다.




   92년 봄, 여동생의 대학 입학식에 다녀온 날이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엄마가 가족 모두를 모이라고 했다. 전에 없던 일이라 다들 궁금해하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나서 엄마가 우리 삼 남매의 얼굴을 차례로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드디어 너희 셋을 모두 대학생으로 만들었으니 내 소원은 거의 다 이룬 셈이다. 이제 마지막 소원이 하나 남았다.”


   그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뻔히 예상되는 엄마의 지청구를 하나 남은 소원쯤으로 생각했다. 대학 잘 다니고, 졸업 잘하고, 좋은 회사 취직하고, 그리고 멋진 배필 만나서 잘 살라는. 그러나 곧 이어진 엄마의 단호한 말투는 그 뻔한 생각들을 저만치 걷어차 버렸다.


   “나도 이제 한글 공부를 해야겠다. 그게 내 소원이다.”


   차라리 학교를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면 조금은 다르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냥 공부를 하고 싶다는 표현이었으면 우리의 충격이 덜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글 공부라니. 엄마가 한글을 모른단 말이야? 어리둥절해 하는 우리에게 엄마는 그동안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었다.




   외할아버지는 어부漁夫였다.


   자신의 배[船]를 가졌으니 적어도 가족들이 배를 곯는 일은 없었다. 남달리 정이 많은 분이었지만 자식들, 특히 딸들의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마을의 모두가 똑같았다. 딸들은 그저 어릴 때부터 집안일이나 거들다가 열아홉, 스물 즈음에 시집을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래서 큰 이모도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네에서 함께 자란 친구들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았다. 어쩌다 아무개가 읍내로 이사를 가서 그 집 딸이 국민학교에 다닌다는 소식이라도 전해지면, 소꿉살이 또래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고지식한 어른들로부터는 손가락질을 받기 일쑤였다. 돈이 썩어 나자빠졌나 보다, 계집년을 학교에 보내다니, 미쳤군 미쳤어.


   심지어 나이 열 살을 넘겼는데도 호적이 없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동네에서 나름 넉넉하게 살았던 집의 막내딸인 엄마조차도 열여덟 살이 되어서야 겨우 소급遡及해서 호적을 실었다고 했다. 호적이 없으니 당연히 취학 통지서가 나올 리 없었다. 시대가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면했던 엄마는 외삼촌들 어깨너머로 기역니은을 따라 하고 일이삼사도 흉내 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결국 엄마는 정식으로 국민학교를 다닌 적도, 정식으로 한글을 배운 적도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고향에 있을 때는 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도시로 나오면서부터 무학無學이라는 사실이 엄마의 발목을 수시로 잡고 늘어졌다. 담임 선생님이 보낸 가정통신문에 답장을 못해 쩔쩔매었던 일, 관공서에서 글을 모른다고 핀잔을 들었던 일, 은행에서 송금을 할 때마다 매번 직원들의 도움을 받았던 일, 버스 행선지를 읽을 수 없어 결국 하염없이 걸어와야 했던 일, 젊은 사람이 글도 제대로 모르냐며 면박을 주던 시장市場 사람들과의 다툼 등등, 켜켜이 박힌 상처들이 엄마의 오랜 기억으로부터 물밀 듯 쏟아져 나왔다.


   무엇보다 염려가 된 것은, 뒷날 손자들이 태어나면 하다못해 동화책 한 구절이라도 제대로 읽어줘야 할 텐데 까막눈 할머니라고 놀림받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고, 상급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학교에서는 어김없이 가정환경조사서를 써내라고 했다. 거기에는 이것저것 쓰잘데 없는 질문들과 함께 부모님의 학력을 기록하는 칸이 반드시 끼어 있었다. 내가 국민(초등)학교 때, 아버지는 엄마를 '국졸'이라고 적었다. 중학교에 갈 때는 두 분 모두의 학력을 '중졸'로 써주었다. 딱히 선생님이 그것을 문제 삼는 경우는 없었다. 처음부터 형식적인 것이었고 진위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나는 공연히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못 배운 것이 엄마의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가 국졸이든 중졸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친구들의 대학 나온 엄마들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엄마가 제대로 못 배웠다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러나 지금 엄마의 탄식을 듣고 보니 당사자인 엄마에게는 마냥 괜찮은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평생을 억눌러 왔던 마음의 짐을 털어놓으며 엄마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다짐을 받았고, 또 부탁을 했다.


   “내가 이제 한글을 제대로 배우려고 한다. 이때까지는 내가 너희들을 뒷바라지했으니, 지금부터는 너희들이 제발 나를 도와다오.”


   엄마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아버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누나와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남자라며 나는 꾹 참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은 어찌어찌 참았으나 콧물만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가족들의 응원을 받으며 엄마는 한글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누나는 부산 서면에 있는 한글학교를 수소문했고, 연락처를 전달받은 내가 곧장 달려가서 일 년 치 수업을 등록했다. 동생은 어린이 동화책을 준비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방과 공책, 연필, 필통, 스케치북을 사 왔다. 미술 수업은 없었는데. 그렇게 해서 엄마는 드디어 가방을 메고 한글 공부를 하러 학교에 가는 귀여운 여학생이 되었다. 엄마 나이, 바야흐로 마흔여덟이던 해였다.


   저녁이 되면 엄마는 아버지와 함께 소리 내어 신문을 읽었다. 누나는 받아쓰기 시험을 감독했고, 여동생은 숙제 검사를 했다. 나는 때때로 엄마를 승용차에 태우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간판을 읽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한글을 배우던 방식 그대로였다. 집안일을 병행해야 했으니 당연히 피곤할 법도 했지만 엄마는 숙제를 거르거나 학원을 빠지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책꽂이를 정리하는데 전공 서적들 사이로 낯선 공책 하나가 삐죽이 모서리를 내밀었다. 겉 종이에는 엄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글학교에서 사용하는 것 같았다. 무심코 표지를 넘겼다. 삐뚤빼뚤 글씨가 하얀 공책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 이게 엄마의 글씨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리운 나의 아들 창호야

보고 싶은 나의 아들아. 너를 저 세상에 보낸 지도 벌써 이십 년이 넘었구나. 엄마는 무식하고 가난해서 돌도 안 된 너를 잃었다. 엄마는 너를 잃고 너무나 많이 울었단다. 그때 너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 지금도 한스럽구나. 너를 보낸 후에 엄마는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 엄마를 많이 원망하겠지. 나중에 너를 만나면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자. 엄마가 이제 한글을 배웠으니 매일 너에게 편지를 쓸게.

보고 싶다, 사랑한다, 나의 아들 창호야 (중, 후략)


   그것은 죽은 형에게 쓰는 편지였다. 공책을 펴 든 채로 나는 한 시간이 넘도록 멍하니 서 있었다. 다음 장을 넘겼다. 또 거기에는 외할아버지에게 쓴 글이 있었다.


보고 싶은 아버지

꿈속에서도 그리운 아버지, 막내딸 종심이에요. 아버지의 막내딸이 이제 한글을 배워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씁니다. 공부를 가르쳐 주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했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아버지는 행복하신가요? 어머니는 남해에서 잘 살고 계시고 저는 세 아이를 모두 대학에 보내고 행복하게 삽니다. 더 많이 배울 겁니다. 나중에 학교도 가고 싶어요.

그리운 아버지, 보고 싶어요. 막내딸 종심이가 (중, 후략)


   한글을 배운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고 싶었던 엄마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죽은 형과 외할아버지였던 것이다. 공책 안에는 그것뿐만 아니라 어릴 적 고향 친구들에게 쓴 편지와 이미자의 노래를 옮겨 적은 것도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공책을 살펴보는 것이 또 다른 일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며칠 후부터는 공책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몰래 훔쳐본다는 것을 엄마가 눈치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엄마는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한글 공부를 마치게 되면 정식으로 초등학교 검정고시에 도전해 보자고 가족끼리 뜻을 모았다. 그러나 계획을 잠시 멈추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고 말았다. 맞벌이 교사로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누나가 첫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누나가 출근하는 동안 아이를 돌봐야 하니 엄마가 한글학교에 갈 수 없었다.


   엄마는 불평하지 않았다. 딸의 자식, 손주를 맡아 키워주는 것 역시 엄마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조카를 재운 그 옆에다 밥상을 펴고 혼자서 한글 공부를 이어갔다. 이듬해에는 또 작은 조카가 태어났다. 엄마의 도전은 그만큼 또 늦어졌다. 작은 조카까지 다 컸다 싶을 때, 이번에는 시골에서 할머니를 집으로 모셔와야 했다. 물론 할머니의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엄마는 충분히 공부를 다시 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치매를 앓았다. 그 몹쓸 병은 십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달 뒤, 이번에는 외할머니를 집으로 모셔왔다. 아버지의 뜻이었다. 몇 년 뒤,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셨다. 그제야 우리는 엄마에게 다시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엄마 나이가 일흔을 넘겼다. 엄마는 한글을 익힌 것만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내 생각엔 자신감을 잃은 것 같았다. 아버지도, 누나도, 그 누구도 더 이상 설득할 수는 없었다. 결국 엄마 인생에서의 공부는 2년 동안의 한글학교,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셈이었다.




   엄마가 한글 공부를 시작하던 그때로부터 얼추 삼십 년이 지났다. 마흔여덟 살이었던 엄마는 이제 곧 여든을 바라보는 연세가 되었다. 당신 인생에 더 이상의 공부는 없다고 몇 번이나 선을 그었던 엄마였다. 그러던 엄마가 뜻밖에도 원고지 뒷면에다 글을 써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책으로 만들고 싶단다.


   무엇이 그 결심의 계기가 되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혼자서 용기를 내고 문구점을 찾아갔을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책을 만들려고 하는데 어디에 글을 써야 합니까? 당연히 문구점 주인은 원고지를 권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가 원고지 사용법을 알 리 없다. 고심 끝에 엄마는 원고지 뒷면에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태어난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일대기, 이른바 자서전을 따박따박 적어 내려간 것이다. 분량은 모두 원고지 스물여덟 장이었다.


   “니도 알다시피 내가 무식해서 글이 전부 엉터리다. 창피하다만 그래서 니가 좀 고쳐주면 좋겠다. 그리고 이거를 책으로 만들려면 돈이 얼마나 들겠노?”


   나는 엄마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겨우 답했다. 목소리가 자꾸만 어긋나려고 했다.


   “엄마, 서울에 가면 저렴하게 해주는 곳이 많아요. 제가 잘 고치고 다듬어서 책으로 만들어 드릴게요. 그리고 돈 걱정은 마세요.”


   서류 봉투에다 원고를 담았다. 겨우 스물여덟 바닥에 불과했지만, 이백 팔 십장, 아니 이천팔백 장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조심스레 원고를 꺼냈다. 숨을 고르고 한 장씩 찬찬히 읽었다.


   엄마가 태어나던 날부터 인생의 사건들이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결혼을 하고, 형이 죽고, 고향을 떠나고, 내가 아프고, 새 출발하고, 우리가 진학하고, 누나가 결혼하고, 조카들이 태어나고. 삐뚤빼뚤한 글씨처럼 굽이진 엄마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겼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지만 빌어먹을 눈물이 또 흘렀다. 앞자리의 남자가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고작 스물여덟 페이지를 읽는데 부산에서 서울까지 두 시간 반이 모자랐다.


시집오던 날
누나의 발병
엄마의 기도
형의 죽음


   늦은 저녁, 원고를 꺼내 책상 위에 우선 올려 두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었다. 이것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릴없이 원고지를 뒤적이자 또 청승맞게 눈물이 났다. 전혀 울 일이 아닌데, 오히려 손뼉 치며 환영해야 할 일인데 이상하게도 엄마의 글만 보면 눈물부터 흘렀다.


   그때 아내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전후 사정을 알 리 없는 아내가 장난치듯 내 어깨를 툭 쳤다.


   “울보 아저씨는 무슨 이야기에 감동을 받았길래 또 이렇게 혼자서 훌쩍거리시나요?”


   원고를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리고 굳이 감출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어깨너머로 원고를 건넸다. 받아 든 아내가 그것을 읽는 동안, 나는 몰래 눈가를 닦았다. 슥슥 종이 넘기는 소리가 몇 번 들리는가 싶더니 결국 아내의 숨소리 역시 탁하게 변했다.


   “에효, 어머니도 정말...... 진짜 대단하시다, 우리 어머니.”


   그 말에 힘을 얻은 나는 아내를 향해 돌아앉았다. 이걸 책으로 만들어 달라시는데 글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눈이 촉촉해진 아내가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걸 어떻게 고쳐요, 그리고 왜 고쳐요? 지금 이대로가 가장 멋진 글인데!”


   그러더니 뜻밖에도 아내가 자기한테 모든 걸 맡기란다. 원고지를 간추린 다음, 아내는 그것을 들고 서둘러 방을 나갔다.




   다음날 오후,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뭣하러 그것을 에미에게 보였냐는 거다. 하지만 화를 내거나 나무라는 말투는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침 일찍 아내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단다.


   “어머니, 정말 놀랐어요. 이때까지 제가 읽어본 글들 중에서 어머니가 쓰신 글이 제일 감동적이에요. 그런데 몇 장만 더 써 주시면 좋겠어요. 내용이 늘어나면 진짜 멋진 책이 될 것 같아요. 어머니, 제가 어머니의 며느리인 것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자랑스럽기는커녕 한글도 제대로 모르는 시어미가 오히려 부끄럽지 않을까. 엄마자조 섞인 말을 했다.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엄마가 더 잘 알지 않냐고, 그렇게 엄마를 다독였다. 아내가 엄마에게 글을 더 써 달라고 한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아내는 벌써부터 인맥을 동원해서 삽화 작가를 찾고, 제목을 멋지게 써 줄 친구에게 연락을 서두르는 눈치였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 중에 마냥 편하고 수월하게만 살아오신 이가 과연 몇 분이나 될까? 쓰지 않고 기록하지 않았을 뿐,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백일의 낮과 천일의 밤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그저 시대가 그랬으려니, 그저 여자의 운명이었으려니, 그저 엄마의 길이었으려니 하며 한숨으로 덮고 눈물로 가리며 살아오셨을 인생들이다. 애당초 너나의 힘듦에 우열을 따질 필요가 없이 열하기만 했 각자의 삶, 이제는 그래도 돌아볼 여유가 생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엄마는 그것을 기록해 두고 싶었을 것이다. 조금의 보탬이나 과장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엄마의 날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엄마의 기록 있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생의 맞춤법이 있었다면 맞닥뜨린 고비마다 틀리지 않도록 제대로 된 길 하나를 알려주었을 것이고, 인생의 띄어쓰기가 있었다면 피할 수 없는 역경은 단숨에 건너뛰도록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있을 리 없다. 어머니들은 어긋난 길임을 알면서도 참고 걸어야 했고, 쉴틈을 주지 않고 몰아닥치는 불행 역시 묵묵히 부딪히며 살아야 했다. 어느 누구도 이것이 원칙이라며 가르쳐 주지 않았다. 맞건 틀리건 그저 참고 견디며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곧 당신의 인생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글을 앞에 두고 아내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관대한 편집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즉, 엄마의 글을 어떠한 교정矯正도 없이 처음 원고 그대로 옮기기로 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엄마의 글은 설령 맞춤법이 조금 틀렸거나 띄어쓰기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함부로 고쳐서는 안 되는, 지금 모습 그대로 존중받아야 할 엄마의 인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며느리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엄마는 지금 당신의 글을 다시 쓰고 있다. 원래보다 몇 가지 이야기가 더해질 것 같다. 물론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더이상 신경쓰지 않는다. 원고지 뒷면에다 쓰는 것은 처음과 마찬가지다.


   올 가을, 당신의 생일이 되면 엄마는 책 한 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나이 오십에 한글을 배운 엄마가 원고지 뒷면에다 직접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쓴, 무려 서른 장 분량의 자서전이다. 어쩌면 그것은, 엄마가 당신의 인생에게 수여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훈장일지도 모르겠다.  


성공한 나의 인생



All Images were written By Song Yeo-Sa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