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하순의 순간) 믿음과 삶은 일치할 수 있는가.
믿음과 삶은 일치할 수 있는가. 믿음과 삶의 일치는 가능한가. 삶과 일치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인가.
요즘 나는 내 일이 안되는 이유를 완전히 밖으로 돌리고 ‘오늘도 무사히’만을 외치며 지내는, 그러면서도 마치 자기가 속한 기계 장치 전체가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다고 혼자 궁시렁 거리는, 그 기계 장치 속의 한낱 심술궂은 나사같은 자세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지역 사회를 위해, 일터 전체를 위해 뭔가 조언하려거든 당장 나와 내 사무실부터 돌아보고 반성하고 개선해나가는 노력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자꾸 거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어쩌면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인데, 왜냐하면 거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실현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지금, 여기, 주어진 일을 해나가는 것조차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지금의 나를 반성하려 하다보면 ‘당장 지금, 여기, 주어진 일’이 어려운 이유가 뭔가 구조적인 거대한 문제 때문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당장 지금 여기 나의 일이 해결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방패처럼 들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뭔가 거대한 이야기를 하게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나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오롯이 내 책임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어느정도 현실의 부정성을 견디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맞는 생각일 것이다. 모든 상황은 주어진 것이고, 그렇기에 내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고, 그러니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나는 능력이 좀 모자란 편이며, 이미 내재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지금 여기의 문제는 그냥 받아들인 채로 어떻게 한번 더 자연스럽게 지나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낫다는 식의 생각의 흐름. (어차피 시간은 흐르게 되고 만나는 사람들은 달라질 것이니까.)
토론 이론에서는 이런 것을 (특히 정책 논제에서) 핵심 쟁점 중 ‘내재성’이라 부른다. 제도가 되었든, 인간의 인식이나 감정이 되었든 지금 그렇게 내재된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먼저 해결되지 않으면 눈 앞에 어떤 문제가 해결되기 힘들다고 보는 그런것. 찬성측은 그렇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이 문제가 지속될 것이니 무언가를 해서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하는 쪽이 된다. 반대측은 찬성측이 제안한 새로운 시도가 이 내재성을 해결할 수 없다고 반박을 하는 쪽이 되는 것이고. 앞 문단에서 한 말들을 사용해 표현한다면, 찬성측은 ‘지금, 여기, 주어진 문제’가 거대한 구조 등에 이미 내재된 어떤 특성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야하는 것이고, 반대측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논박해야하는 것이다.
잠시 토론 이론으로 길이 빠졌지만, 요즘의 나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온다. 나는 지금 길을 잃은 것인가, 애초에 갈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걷지도 않으면서 도착할 수 없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