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1화. 수전 니먼,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수전 니먼, <<워크는 좌파가 아니다>>, 생각의 힘, 2024. 읽고.
부족을 넘어 인간성을 향해 전진하자는 책.
책 소개를 그냥 해보자면,
이런 책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각자 서로 부족처럼 묶여
각자의 권력을 쟁취하는 상태가 좋아 보이는가,
아니면,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중심으로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정의를 세워가는 상태가 좋아 보이는가?
만약 후자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읽어보자.
도움이 되는 생각과 사례, 논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좌파일까?
뭐라 딱 부러지게 설명하긴 힘들지만,
나는 좌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부감이 있다.
그럼 나는 우파일까?
나는 우파가 그렇게 매력적인 단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좀 끌리는 편인 것 같다.
그럼 나는 뭘까?
예를 들어, 내가 우파라고 생각하면 내가 우파가 되는 걸까?
혹은 굳이 좌파와 우파를 선택해야 하는가?
애초 내가 좌파니 우파니 하는 개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이것도 잘 모른다.
그러니 뭐라 말하기 어렵다.
게다가 우파나 좌파가 정확히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일까?
그것도 아니지 싶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가 정말 정말 각자 다양할 것이다.
얼마 전 지인들과 대화 중
내가 나 스스로 보수적인 쪽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더니,
누군가가
“선배는 보수적이라기보다는 관용적인 것 같아요.
뭐든지 ‘뭔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라고 하잖아요.”라고 했다.
그럼 나는 관용파인가.
어쩌면 아직 뭘 잘 몰라서 막 말하고 있는 것이거나,
쫄아서 이것저것 더 들어보는 것으로 방어하고 있는
뭐.. 쫄쫄이파가 아닐까. 허허.
아마도 나는 나 스스로 명시적으로 선택해 밝히지 않아도
내 무의식과 의식의 차원에서,
지금 여기에서,
어떤 관점으로 혼란스럽게 정립되어 가는 과정에
있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명확하게 자신을 이런 쪽이야라고 규정하며
마치 더 이상의 변동은 절대 없을 것처럼
확신하는 사람들이 의아롭다.
신앙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이 책은 도서관에서 빌린 것이다.
충동적인 대출이었다.
원래 요즘 한창 글을 쓰고 있는 '단어'와 '어휘'에 대한 책을
찾아보던 중이었다.
긴 서가를 훑어 지나가며
내가 검색한 도서의 서지정보에 맞는 위치를 찾던 중
눈에 ‘WOKE’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하필 이 책이 놓인 자리가
서가에서 책등만이 아니라 책 표지까지 보이는
맨 끝자리에 놓여 있었던 것도 한몫했다.
WOKE.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정확한 이유를 모른 채 왠지 미심쩍은 생각이 드는 단어로
나에게 인식되고 있는 단어.
뭔지 잘 모르고 대강의 지식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갖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있어서
그럼, 이번에 알아보자 하면서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대출해 왔다.
처음 읽을 때는 좀 어려웠고, 집중하기 어려웠는데
'보편주의'와 '부족주의'를 비교하며 설명하는 부분에서부터
눈에 좀 들어왔다.
지금도 책에 담긴 저자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예를 들어 이런 문장들.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 갖게 된 우연적인 속성들, 그리고 여러 날 숙고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원칙들. 당신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전통적으로 우파는 첫 번째에, 좌파는 두 번째에 초점을 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은 이탈리아에 첫 번째 여성 총리가 선출된 것을 두고 힐러리 클린턴과 같은 리버럴 정치인들이 “과거와의 단절”이라고 갈채를 보냈던 순간, 반대로 뒤집히게 되었다.”(29쪽)
예전부터 관념적으로 가지고 오던 좌/우파의 개념과 구분이
요즘 들어 뭔지 모르게 뒤섞여가고 있다는 오묘한 나의 느낌을
비교적 밝게 조망해 생각할 거리를 주는 문장들.
저자가 책에 지적한
WOKE 운동의 문제점은 아래와 같다.
“워크는 이런저런 특정 집단이 정의에 호소하지 못하게 되는 여러 방식이 있음을 강조하며, 그들이 입게 되는 부당한 피해와 상처를 바로잡아 회복하려 한다. 그런데 이렇듯 권력의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정의의 개념은 옆으로 아예 밀려날 때가 많다.”(20쪽)
“워크는 여러 민족 그리고 다양한 인간 집단에게 자기들이 저지른 범죄의 역사를 제대로 보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모든 역사는 범죄의 역사라고 결론을 지어버릴 때가 많다.”(20쪽)
권력을 추구하는 것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다른 것일 수 있다는 아이디어도
생각할 거리가 된다.
실존하는 것에 가까운 ‘권력’과,
이와 반대로 당위적이고 이상적인 측면이 강해
멀리 있는 것 같은 ‘정의’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잘 정리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후에도 많은 내용이 담겨있는 책이고,
좀 더 천천히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을 이해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주장이 절대적인 것은 당연히 아니고,
이 책을 통해 좀 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몰이해와 갈등, 편견과 선입견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인 수전 니먼이
WOKE 운동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그것을 부수는 방식으로
특정 진영을 위해 글을 쓴 것인가,
아니면,
그가 가진 좌파적 이상을 밝히며
WOKE 운동이 가진 문제를 구분해 내 떨쳐내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명확히 하는 글을 쓴 것인가.
성급한 결론일 수 있지만, 내 생각은 후자이다.
물론 읽고 생각하는 이에 따라 다른 결론이 나겠지만.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다루는 방식.
그리고 ‘사람’이라는 개념이 경험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당위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설명.
‘입장인식론’에 대한 정당해 보이는 지적들 등등
기억해 두고 앞으로 더 생각해보고 싶은 내용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으며 기억에 남기고 싶은 문장을
A4 두장 정도의 분량까지 베껴 쓰다가
결국 포기했다.
그냥 이 책을 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내 관점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앵커로 이 책을 소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까지는.
아래는 베껴적은 문장들 중 일부.
그냥 날려버리긴 아까워서. 허허.
“워크는 이런저런 특정 집단이 정의에 호소하지 못하게 되는 여러 방식이 있음을 강조하며, 그들이 입게 되는 부당한 피해와 상처를 바로잡아 회복하려 한다. 그런데 이렇듯 권력의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정의의 개념은 옆으로 아예 밀려날 때가 많다.”(20쪽)
“워크는 여러 민족 그리고 다양한 인간 집단에게 자기들이 저지른 범죄의 역사를 제대로 보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모든 역사는 범죄의 역사라고 결론을 지어버릴 때가 많다.”(20쪽)
“한 아이를 가스실로 데려가거나 산 채로 불태울 수 있는 자는 마땅히 영혼이 있어야 할 자리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이 뻥 뚫려 있는 사람이다.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할 수 없다. 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이에게 폭탄을 떨어뜨리는 일은 훨씬 쉽다. 바로 이 때문에 두 번째 종류의 악이 더 위험하다는 게 안더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둘 다 악일 뿐이다. 둘 모두를 비난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24쪽)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 갖게 된 우연적인 속성들, 그리고 여러 날 숙고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원칙들. 당신은 둘 중 어느 것이 더 본질적이라고 생각하는가? 전통적으로 우파는 첫 번째에, 좌파는 두 번째에 초점을 두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은 이탈리아에 첫 번째 여성 총리가 선출된 것을 두고 힐러리 클린턴과 같은 리버럴 정치인들이 “과거와의 단절”이라고 갈채를 보냈던 순간, 반대로 뒤집히게 되었다. 클린턴은 조르자 멜로니의 정치적 입장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어떤 이탈리아 정치 지도자보다도 이탈리아 파시즘에 가깝다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29쪽)
“정체성 정치에서는 민족적 정체성과 성 정체성 두 가지를 중요시하도록 고집한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방금 우리가 말한 가지가지의 것들이 그 두 가지 이상으로 중요할 수 있다. 심지어 그 두 가지 정체성 또한 생각보다 결정력이 크지 않다는 것을 잠깐만 고민해도 알 수 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아메리카나>>에서 아주 훌륭하게 보여준 바 있듯이, 미국에 사느냐 나이지리아에서 사느냐에 따라 흑인의 삶은 엄청나게 달라진다. 게다가 나이지리아인이라는 정체성도 그 나라 밖에서나 의미를 갖는 말이다.” (42쪽)
“물론 다양성은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선이다. 하지만 유일한 선은 아니다. 권력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지는 묻지 않은 채 그저 권력 구조에 참여하는 개인의 인종 및 젠더 다양성만 증진시킨다면 오히려 더욱 강력한 억압 시스템이 나타날 뿐이다.”(44쪽)
“인간의 경험에서 유독 이 두 차원에 초점을 두는 것은 곧 가장 큰 트라우마를 경험한 차원에 초점을 두자는 이야기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역사의 주체를 더는 영웅이 아니라 희생자에 둔다는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오늘날 정체성 정치라고 불리는 것은 이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다. (중략) 역사의 희생자들에게 초점을 옮기려는 충동이 나타났고, 그 시작은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갈구였다. 그간 역사는 승자들의 이야기였으며 희생자들의 목소리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는 희생자들을 두 번 죽이는 짓이었다. 육신의 죽음을 당한 이들을 기억에서 한 번 더 죽이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입장을 뒤집어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서사로 넣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된 잘못을 바로잡는 행동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희생자들의 이야기가 마땅히 주목을 받게 된다면, 우리의 공감과 동정만이 아니라 시스템 차원에서의 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에서도 응분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45~46쪽)
“이는 진보를 향한 한 발자국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희생자의 입장을 다시 써가는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기 시작했다. 애초 다른 이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에서 일어났던 충동이 완전히 엇나가기 시작했다.”(46쪽)
“최근까지 낙인으로 여겨진 것이 이제는 지위상승의 원천이 되어버렸다.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서사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 고통스러운 출신과 박해의 경험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나면 그 고통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서곡이 된다는 점이다. 그에게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피해자성을 이기고 넘어섰던 것이지 피해자성 그 자체는 아니었다. 그러니 오늘날처럼 사람들이 앞다투어 자기가 경험한 것보다 더 끔찍한 역사를 지어내려 하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다.(48쪽)
“기억해야 한다는 명령은 한때 영웅적 행동과 이상을 기억하라는 외침이었지만, 이제 “결코 잊지 마라!”라는 말은 고통을 끊임없이 상기하라는 요구가 되었다. 하지만 고통을 겪는 것은 미덕으로 내세울 일이 전혀 아니며, 고통 자체에서 무슨 미덕이 생겨나는 경우도 거의 없다. 피해자성은 응분의 보상을 주장할 정당성의 원천이 되어야 하지만, 피해자성 자체를 마치 화폐처럼 당연히 인정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로 여기기 시작하면 인정과 정당성은 미덕과는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분리된다.”(49쪽)
“장 아메리는 독일 나치즘의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조차도 세우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희생자라는 것 자체는 명예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오늘날에는 구닥다리처럼 보이게 된 전제, 즉 기념비란 우리가 경배할 만한 행동을 해서 그 뒤를 따르고 싶은 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49쪽)
“고통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기대하는 정치 따위는 없어져야 한다. 억압은 사람을 깨우쳐주는 예비 학교와 같은 것이 아니다.(올루페미 타이워의 말을 재인용)”(51쪽)
“아메리와 타이워의 비판은 입장 인식론의 여러 중요한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입장인식론은 우리의 사회적 지위 각각이 지식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중략) ‘어떤 권력관계의 다발에서 끄트머리의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은 권력을 점유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던 이들이 얻지 못하는 비판적인 이해를 (우선 사회적 세계에 대해서) 얻게 된다는 것이다.’(미란다 프리커) 이는 중요할 뿐만 아니라 직관을 통해 다가오는 것으로서, 여기에 많은 혜안이 담겨 있음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두 가지 질문이 남는다. 물론 사람이 아무 권력이 없는 상태에 처하면 비판적 이해를 얻게 될 가능성이 있지만, 그게 언제나 벌어지는 일일까? 입장 인식론을 전투적으로 옹호하는 이들이라 해도 그렇게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언제나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면, 무력감의 경험이라는 것을 정치적 권위의 필연적인 원천으로까지 승격시키는 것이 옳은 일일까?
나라면 차라리 권위를 내세울 권리라는 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세상에 떤 일을 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모델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희생자들이 역사의 잿더미로 다시 파묻히는 것은 아니다. 희생자를 돌보는 것을 미덕으로 존중하게 되지만, 희생자가 되는 것 자체가 미덕이라는 생각은 장려하지 않을 수 있다.”(52쪽)
“정체성 정치는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여러 구성 요소를 단 하나의 요소로 축소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장 통제할 수 없는 종류의 요소를 들어 그것을 우리 본질로 삼아버린다. 정체성 정치가 제기하는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정체성 정치라는 용어 자체는 이제 해로운 것으로 변질되었다. (중략) 나는 ‘부족주의’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중략) 부족주의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자기들 종족과 나머지 모든 사람 사이에 근본적인 인간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란 상태가 야기되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54쪽)
“인류 전체를 관통하는 보편을 추구한다는 것은 모두 위선적인 거짓말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고통에서 시작해 보자. (중략) 다음으로 신체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중략) 기본적이라고 생각했던 또 다른 예 하나를 보자. 우리는 모두 자유롭게 태어났으며, 우리의 자유를 제약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저항하는 경향을 띤다. (중략) 모든 논리는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질문에서 구체화된다고 할 수 있다. (중략) 비인간화로 내몰리는 이들에 대하여 그들도 인간이라고 호소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가 억압에 대응하기 위해 사용하는 보편적인 형식이다.”(57~59쪽)
“지금 좌파 진영에서 보편주의가 집중 공격을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특수한 시대와 장소와 이해관계를 반영할 뿐인 지배적 문화를 추상적 인간의 이름을 내걸고서 다른 문화에 강요하는 가짜 보편주의와 뒤섞여버렸기 때문이다. (중략)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자신이 쌓아 올린 이 위대한 성취의 높은 수준까지 스스로 올라서지는 못했고 밑바닥 수준에 붙들린 채 지역적 편견에 갇힌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인간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얻어낸 것은 마땅히 칭송받아야 할 위대한 업적이다. (중략) 실제로 슈미트는 인간이라는 보편주의적 개념은 유대인이 비유대인 사회에서 권력을 얻으려는 자기들의 특정 이익을 은폐하려는 의도에서 발명해 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내놓았던 주장이기도 하다. (중략) 반계몽주의자들은 ‘인간’이 개념적 경험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한두 순간 슬쩍 훑어보기만 해도 포착할 수 있는 개 심지어 프랑스인 같은 것과는 다른 종류의 개념이라는 점이다. (중략) “‘인간’이라는 말을 내뱉는 이들은 모두 일종의 규범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헌법의 첫 번째 문장처럼 “인간의 존엄은 불가침이다”와 같은 언어를 쓴다면, 이 점이 은폐될 수도 있다. 만약 객관적 사실에 대한 언명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문장은 사실 터무니없는 말이다. 제3제국이 상상을 초월하는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지 불과 몇 년 후에 쓰였으니까. 이 문장의 의미는 당위적인 것으로, 누군가를 인간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 안에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존엄성이 깃들어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60쪽~64쪽)
“좌파 진영이 부족주의로 선회한 것이 특히 더욱 비극적인 이유는, 초기의 민권 운동 그리고 반식민주의 운동이 모든 형태의 부족주의적 사고에 단호히 반대했다는 데 있다. 이 운동들의 힘은 “모든 형제자매가 자유로워지기 전까지 우리는 모두 노예다”라는 노래 가사에 잘 표현되어 있다. 부족주의는 위험한 게임이며, 우파는 이 점을 아주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소수자의 요구가 인권이 아니라 특정 집단의 권리에 불과하다면, 다수도 자기들 권리를 고집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중략) 다른 집단도 다 자기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허용되는 판인데, 백인 유럽인이라고 해서 자기들 권리를 위해 일어서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64~65쪽)
“한나 아렌트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민족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인류에 대한 범죄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렌트가 이런 주장을 했던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은 구별이었지만,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 BLM”운동을 지지했지만, 이는 내가 흑인이라는 부족의 성원이어서가 아니며 나의 선조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죄의식 때문도 아니다. 내가 이 운동을 지지한 이유는 무기를 소지하지도 않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65~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