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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채기 May 30. 2023

핀란드산 취미와 그 철학(1)

나의 취미생활인 사우나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사우나는 내가 정말 아끼는 취미이자 고단한 인생에서 나를 붙들어 주는 은인 같은 존재다. 그리고 이상한 이야기지만 이 취미는 항상 나에게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만 같다. 이번 기회에 정리해 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여행을 갔다 오면 무엇이 남을까? 누군가는 "남는 것은 사진뿐이야"라고 말한다. 분명히 맞는 말이다. 꿈만 같은 여행에서 돌아오면 그 시간은 꿈처럼 증발해 버린다. 오직 사진만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 사진들을 들여다볼까? 다른 사람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사진을 잘 찾아보지 않는다. 어느 순간 잊어버리고 잘 보지 않게 된다. 어딘가에서 잊혀지고 있는 여행의 증거물. 그걸 과연 "남았다"라고 할 수 있을까? 사진은 남아있지만, 사진은 나에게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낀다. 나는 사진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남을 수 있다고 증언한다. 나는 여행에서 취미를 남겨왔다.





핀란드에 여행 갈 행운이 있었다. 나는 핀란드를 좋아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나는 바이킹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의 고향인 북유럽을 좋아한다. 그리고 겨울을 좋아하기 때문에 겨울이 길고 예쁜 북유럽이라면 전부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과묵하고 개인주의적인 핀란드의 문화가 나와 어울린다고 믿는다. 나라는 인간은 저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핀란드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사우나"다. 핀란드는 사우나가 유명하다. 핀란드에서는 어딜 가나 사우나를 할 수 있다. 마치 일본에 가면 어디에서나 목욕을 할 수 있듯이 말이다. 사우나라는 말이 애초에 핀란드어라는 사실을 아는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사우나가 좋다. 온천도 좋다. 그렇다, 나는 사실 따뜻한 것을 좋아한다.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도 오직 겨울에만 "따뜻함"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이 돼야만 앙상한 나뭇가지가 있다. 그들과 함께 비참하게 추위에 떨다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는 행복. 여름에는 없는 행복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겨울에 핀란드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 도달했다. 현지인들에게 물어물어 그곳을 발견했다. 구글조차 알지 못하는 곳. 핀란드 사람 중에서도 정말 사우나 마니아들만 아는 곳. 사우나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운영되는 곳. 그래서 입장료도 없는 곳. 이용자가 직접 땔감을 쪼개서 불을 때는 곳. 핀란드식 사우나의 정점에 나는 도달했다.



호수 바로 옆에 작은 오두막이 보였다. 사우나였다. 오두막 옆에서 누군가가 장작을 패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조언에 따라 캔맥주를 사 갔다. 추운 날씨 덕분에 마트에서 살 때보다 맥주는 더 차가워져 있었다. 나는 옷을 벗었다. 눈밭에서 알몸으로 있는 기분은 뭐랄까. 짜릿하게 비참했다. 그곳은 정통 핀란드식 사우나이기 때문에 알몸으로 들어간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두막은 하나였다. 즉, 남자와 여자가 함께 알몸으로 사우나를 한다는 의미다. 물론 핀란드 금발 여자의 알몸을 보려고 그곳에 간 것은 저어어얼대에 맞다.


핀란드식 사우나는 습식이다. 뜨거운 수증기를 사용한다는 의미다. 사우나 안에는 물을 부을 수 있는 불이 중간에 있다. 때문에 사우나 안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나는 알몸에 맥주 한 캔만을 들고 사우나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뜨거움이었다. 지옥에 온 것 같은 고열이었다. 참고로 난 뜨거운 것을 잘 견디는 편인데도 숨이 턱 막히면서 괴로웠다. 하지만 내 입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이해했기 때문이다. 왜 내 손에 캔맥주가 있는지를. 핀란드 사람은 미친 듯이 추운 겨울날에도 시원하게 맥주를 즐길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누군가는 습식이니 맥주니, 관심 없고 알몸의 금발 미녀 이야기가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더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뚱뚱한 아저씨 이야기다. 오두막 안에 남다른 포스로 앉아 있는 뚱뚱한 아저씨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분이 사우나 랭킹 1위인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핀란드에는 사우나 대회가 있다고 한다. 사우나에서 누가 가장 오래 버티는지를 겨루는 대회인 듯싶다. 그 아저씨는 이번 대회에서 한 러시아 사람이 자기와 겨루다 사망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날 세상에서 사우나를 제일 잘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재미없었다면 죄송합니다. 자랑... 하고 싶었어요)


 핀란드 사우나의 하이라이트이자 화룡점정. 바로 호수에 뛰어들기다. 핀란드 사람들은 사우나를 즐기다가 호수로 뛰어든다. 내가 갔을 때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호수가 얼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구멍을 내서 들어간다. 얼마나 차가울지 상상이 가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지 그 상상 이상 곱하기 두 배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내 몸에 잔 상처들이 나 있었다. 아마 얼음에 긁힌 모양인데 너무 차가워서 긁히는 고통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어쨌든 호수에 입수했다가 올라오면 추워 죽을 것 같다. 머릿속에는 한가지 생각뿐이다. "다시 사우나에 들어가야 한다. 안 그러면 죽는다."


그렇게 다시 사우나에 들어갔을 때 나는 소리 내 웃고 말았다. 그 웃음은 인생에서 몇 번 나오지 못할 희귀한 웃음이었다. 나는 그 웃음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생존했다는 성취감에서 나오는 웃음이었을까? 내 체온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지옥처럼 뜨거웠던 사우나가 전.혀. 뜨겁지 않았다. 아.무.런. 더위도 느끼지 못했다. 불지옥이 피난처로 변해있었다. 지옥이 천국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환희의 웃음이였을까? 아니면 지옥에서 사는 악마가 된 듯한 전능 감이었을까? 그러나 그 전능 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몇 분만 지나도 다시 더워 뒤질 것 같으니까. 그러면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올라온다. "다시 호수에 들어갔다 올까?"


결국 극단의 추위와 극단의 더위를 몇 번 오갔다. 그렇게 생사가 오가는 사이에 우울함이나 불안함 따위는 존재하지 못한다. 그곳에는 걱정도 없고 후회도 없다. 전투광이었던 바이킹은 전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삶과 죽음 그사이인 그곳에서 가장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나는 핀란드에 다녀온 이후로 핀란드식 사우나를 즐기게 되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 기분이 좋지 않은 날, 나는 목욕탕에 간다. 우리나라 목욕탕에도 사우나가 있고 냉탕도 있기 때문이다. 호수 옆에 있는 오두막은 아니지만 추위와 더위를 오갈 수 있다. 최소 한 시간, 오래 하면 몇 시간이고 하고 나온다. 가끔은 내가 이런 취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부끄럽기도 하다. 오로지 육체적 감각과 쾌락에 집중하는 행위이니까. 그게 뭐가 문제겠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니다.

핀란드식 사우나는 내 삶에 패턴 중 하나가 되었다. 예쁜 케이크를 먹고 나서 나에게 남는 것은 케이크 사진일까 아니면 옆구리에 붙은 살덩어리일까. 그녀와 함께하며 나에게 남은 것은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일까 아니면 바뀐 음식 취향일까. 후자가 진정 "나에게 남았다"는 말에 어울리지 않을까? 여행에 가서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예쁜 사진도 많이 찍고 와야 한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 여행을 간다고 하면 너 자신이 바뀌는 여행이 되면 좋겠다고 말해주고 싶다. 여행 가기 전의 나와 여행 갔다 온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면 좋겠다. 세계관이 넓어졌다든지, 입맛이 바뀌었다든지. 물론 사람이 너무 많이 바뀌면 안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어차피 안 일어날 테니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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