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와 냉탕을 오가며 나는 가끔 묘한 느낌을 받곤 한다. 이 행위가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고, 또는 상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핀란드식 사우나가 나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 것. 나는 그걸 "극단의 중용"이라고 부른다.
이 그림에서 나는 핀란드식 사우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림을 보면 흰색 안에 검은 원이 있고 검은색 안에 흰색 원이 있다. 핀란드에서의 사우나가 딱 저런 상황이었다. 추운 겨울 안에 더운 사우나, 뜨거운 사우나 안에 차가운 맥주, 차가운 호수 안에 뛰어든 뜨거운 나, 다시 뜨거운 사우나 안에 차갑게 식은 나. "음양의 조화"라고 불리는 이 그림이 무슨 의미인지 옛날부터 궁금했다. "조화"라는 단어 때문에 혹시 "중용"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많은 현자들이 중용을 외쳤으니까.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지나친 것은 나쁘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용을 말하고 싶었다면 그림을 이렇게 그려야 하지 않을까?
회색이야말로 흰색과 검은색의 중간이니까.....
핀란드식 사우나를 하며 나는 생각했다. 중간을 지키는 방법에는 2가지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예를 들어 평균을 5로 맞추고 싶다면 5를 두 번 하면 된다. 그러나 0 한 번, 10 한 번도 그 평균은 5다. 양극을 한 번씩 오가는 것도 중용이지 않을까? 음양의 조화는 어쩌면 양극단을 오가는 중용을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것이 "도"라고.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삶의 방식이라고. 가장 좋은 상태라고. 내가 극도로 차가운 호수에서 극도로 뜨거운 사우나로 돌아왔을 때 느꼈던 적당함. 덥지도 춥지도 않은 상태. 그러나 웃음이 나올 정도로 살아있음을 느꼈다. 아! 나의 웃음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음양의 조화였다. "도"에 도달한 자의 웃음이었다.
회색 원이 말하는 중용은 무엇이든 적당히 한다. 적당히는 아무 문제가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바로 그 상태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무 문제도 없다니 그것보다 지루한 일이 있을까? 내가 생활하고 있는 방은 언제나 적당한 온도로 유지되고 있다. 방에 있을 때 나는 언제나 권태롭다. 지루함과 권태보다 괴로운 일이 있을까? 신화학자 조셉 켐벨이 말했듯이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도 지하로부터 수기에서 말했다. 인간은 자신이 기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단지 자아를 주장하기 위해서 파괴하고 저주할 것이라고. 회색 원은 나쁘게 말하면 이도 저도 아니다. 사람들은 워라벨을 외친다. 그러나 결국 일도 그럭저럭 라이프도 그럭저럭인 지루한 인생이 될 위험도 있다.
음양의 조화가 말하는 중용은 적당히 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한다. 물론 어떤 일이든 지나치면 부작용이 생긴다. 일을 너무 많이 하면 건강을 잃는다든지 사생활을 잃어버린다든지 하는 것처럼. 그러나 지나치게 하지 않으면 성과도 없다. 지나치게 하는 사람들은 지루 하느니 부작용과 성과를 모두 감당하고 싶어 한다. 새 하얀색 반대에는 새까만 색이 있다. 양쪽에 있는 극단을 오가면 중용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삶은 어떤 모습일까? 한 달간은 일만하고 한 달간은 쉬기만 하는 삶? 잘 모르겠다. 그저 상징적으로 생각될 뿐이다.
얼음처럼 차가워진 피부에 뜨거운 수증기가 닿는 느낌. 그런 느낌으로 인생을 살고 싶다. 기괴한 소리라는 점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껏 너무 적당히 살아온 것 같다. 나도 한 번 극단적으로 살아보고 싶다. 부작용도 끌어안을 만큼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기계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소중한 것을 파괴해 보고 싶다. 나의 자아를 주장하기 위해 인생에 저주를 걸어보고 싶다. 한 번은 영웅처럼, 한 번은 인간 쓰레기처럼으로도 살아보고 싶다. 극단적인 삶, 아니 정확히는 양극단적인 삶을 살아보고 싶다.
일단 내 첫 번째 목표는 극단적으로 느끼한 치즈버거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느끼함과 함께 중용을 맞추어 줄 음식은 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