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습관적 깨달음에 대한 경계
늘 충분한 오늘을 살 수 있다면, 정말 좋겠으나 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그래서 감히 이런 생각을 꺼낼 자격이 되는가를 고민해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본다. 그래봤자 그냥 '하루'라고.
매일매일 무언가를 깨달아서 글로 남기고자 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어린아이의 일기처럼 '즐거운 하루였다.'로도 충분해 보임에도, 의미 실은 낱말로써 성찰을 끌어내야만 만족하는 그 과정이 역설적으로 내게는 의미 없게 여겨진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수많은 하루 중에서 특별한 날, 특별한 감성을 글로 옮기는 것은 충분히 즐거운 일이고 의미가 있다. 그러나 오직 쓰고 싶어서, 쓰기 위해서 일상의 모든 것들을 소재거리로 여기기만 한다면, 반대로 그 시선 밖에서 존재하는 일상의 색채를 지나칠 수 있다.
편하게 읽어주길 바라는 '좋은 글, 좋은 문장'이, 억지로 짜내는 과정에서 나온다면 그 문장은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조금 회의적이다.
홈런볼과 칸쵸를 매우 애정한다. 자주 먹는 그것들이 매일매일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그런 것을 바라고 먹는 것이 아니고. 그냥 맛있어서 좋아한다.
굳이 "홈런볼의 공기를 머금은 듯 가볍고 바삭한 식감과 안의 달콤한 초콜릿이 삭막했던 하루의 고단함을 녹여내고, 그로 인해 잊고 있던 삶의 달콤함을 찾았다."라고 떠들고 싶지 않다.
아무리 사소한 주제라도 매일매일 성찰하고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인격체는 얼마나 대단한 경지에 오른 것일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를 습관적이고 자의적인 강요로 본다.
내가 이런 습관성 깨달음을 경계하는 것은 모순에 빠지고 싶지 않아서이다.
'행복'이라 거창하게 칭하지 않아도 충분하고 만족스러운 하루를 살기를 바란다. '노력'이라고 명명하지 않아도 살아내기 위해 버틴 하루를 지켜가길 역시 바란다. '도전'이라고 외치지 않아도 언젠가 도달할 무언가에 발을 내딛기를 바란다.
깨닫기 위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내게는 모순이고, 살다 보니 사유의 끝자락에서 무언가를 성찰하고 얻어내는 날이 가끔 있더라고 말하고 싶다.
〈깊이에의 강요〉(Der Zwang zur Tiefe, 1989) 에서, 저자는 정의 불가능한 개념의 '깊이'가 창작자를 억압하는 도구라고 비판한다. 그런 생각들이 모이고, 발전해서 지금의 다양성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새는 반대로 창작자들이 그 '깊이'를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디지털매체의 발달, SNS의 대중화 등 뻔한 원인이 있겠지.
정독이 사라지고, 발췌된 문장 속에서 자기 것을 끼워 맞추는 위로와 격려가 '힐링'이라는 워딩으로 집약되는 것. 평생 세잎클로버와 네잎클로버 이야기만 새로운 것처럼 재생산하는 것. 그래서 갇힌 세계에서 체류하는 것. 그런 것들이 당연시되는 세계에서 머무르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