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재 없이 쉬고, 눈치 없이 낳고, 그래도 회사는 돌아간다
한국에서 휴가를 내려면 절차가 있다.
연차 신청서를 쓰고, 팀장 결재를 받고, 인사 시스템에 올리고. 바쁜 시기라면 면담까지 한다. 결재가 났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 건 아니다. 팀 다 바쁠 때 나 혼자 빠지면 어떡하나 싶은 눈치도 있다. 그 과정이 휴가 자체보다 피곤한 경우도 있다.
오토데스크를 포함한 많은 테크 기업들이 무제한 유급 휴가(Unlimited PTO, Paid Time Off) 제도를 운영한다. 내가 휴가를 갈 때 하는 일은 딱 하나다. 아웃룩 캘린더에 이 기간 "Out of Office"라고 표시하고, 팀원들한테 알린다. 승인 없다. 결재 없다. 인사 시스템에 올리는 과정도 없다. 회사가 내가 연간 몇 일을 쉬었는지 추적하지도 않는다. 물론 2주가 넘는 장기 휴가라면 내 업무의 인수인계 준비가 필요하지만, 그건 어느 회사나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반전이 하나 있다. 한도가 없으면 역설적으로 덜 쉬게 된다. 연차가 숫자로 정해져 있으면 "이걸 다 써야 한다"는 기준점이 생기는데, 한도가 없으면 그 기준점 자체가 사라진다. 실제로 여러 연구에서 Unlimited PTO가 오히려 평균 휴가 일수를 줄인다는 결과가 나왔다. (참조) 그래서 일부 회사들은 연간 최소 휴가 일수를 따로 권고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선진국 중에 국가가 보장하는 출산·육아 휴가 제도가 가장 빈약한 나라다. FMLA(가족 및 의료 휴가법)가 있긴 하지만, 이건 12주 무급이 기본이다. 급여 보전은 없다. 반면 한국은 출산휴가 90일에 최대 1년의 육아휴직, 거기에 일정 수준의 급여를 국가가 지원한다. 미국에서 이 공백을 메우는 건 전적으로 회사 몫이다.
오토데스크는 출산휴가(Maternity Leave) 16주, 육아휴가(Paternity Leave) 6주를 유급으로 준다. 다른 테크 기업들을 보면 육아휴가도 16주씩 주는 곳을 여럿 봤다. 구글은 최대 24주, 메타는 20주를 출산 부모에게 준다. 국가 지원 없이 회사가 알아서 하는 구조지만, 내용을 보면 나름 진지하게 설계했다는 게 느껴진다.
제도만 보면 한국이 훨씬 낫다. 그런데 실제로 쓰는 아빠들이 얼마나 될까. 한국의 아버지 육아휴직 실사용률은 6%대라는 통계가 있다. 10명 중 9명 이상이 제도가 있어도 안(못) 쓴다는 뜻이다. (참조)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눈치다. 아직도 많은 직장에서 아빠가 육아휴직을 쓴다는 건 커리어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아빠가 된 이후로 그게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미국이 좋은 건 제도 자체가 아니다. 실제로 쓸 수 있는 분위기다. 우리 팀 팀원이 6주 육아휴가를 간다는 건,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진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나도 둘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다녀왔다.
우리 팀에서도 4월에 두 명이 출산휴가에 들어간다. 동시에.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머릿속으로 잠깐 계산을 했다. 우리 팀이 원래도 잉여 인력 없이 빡빡하게 돌아가는데, 두 자리가 동시에 빠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사실 답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핵심 팀원이 몇 주 자리를 비웠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처음엔 불편했다. 남은 사람들이 더 바빠졌다. 그래도 분기 마감은 됐고, 보고서는 나갔고, 무너지지 않았다. 회사는 언제나 돌아간다.
이게 어떤 면에서는 불편한 진실이다. 나 하나가 없어도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건, 내가 생각만큼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닐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나는 아내한테 맨날 큰소리 친다. "나는 절대 못 자르지.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아내는 그저 웃는데,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나도 안다. 나 없어도 결국 돌아간다는 걸. 하지만 그냥 주문을 외우는 거다. 나를 자르지 말라는.
미국 테크 기업의 휴가 문화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신뢰다. 당신이 알아서 쉬고 알아서 일할 거라는 신뢰. 결재 없이도, 국가 지원 없이도. 처음엔 낯설었는데, 이제는 다른 데서 일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서 난 앞으로 몇 년이고 여기에 남아 있을 것 같다. 물론, 잘리지 않는 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