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충분하나 연결과 설계가 부족합니다
스탠퍼드 대학의 한 의료연구 센터에서 멘토로 활동하며, 헬스케어 스타트업을 창업한 지인 분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의료 정보가 없어 진료가 지연된 사례를 들려줬습니다. 코로나 시기 자정 즈음 미국 응급실에서 한 한국인 어머니가 자녀의 복통을 호소했으나, 의료진이 병력, 복용약, 알레르기 여부도 정확히 모른 채 진료를 시작해야 했던 일입니다. 문제 해결을 도와준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영국, 대만 등 7개국의 진료 및 처방 데이터를 앱에 저장하고, 영어로 번역해 의료진과 공유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에서도 가능하겠냐라는 그의 질문에 한국에도 유사한 시스템이 있는지 찾아봤습니다. 놀랍게도 보건복지부는 이미 2021년 3월, 의료법 제21조의 2에 따라 ‘나의건강기록’ 앱을 출시했습니다. 진료기록, 예방접종 내역, 건강검진 결과, 처방 이력을 통합 조회할 수 있으며, 자녀 정보 열람과 간편 인증 기능도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놀랍다고 표현한 이유는 이 편리한 기능을 사용 중인 이들을 제 주위에서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의건강기록’ 앱을 직접 설치하고, 구글 플레이스토어에 남겨진 사용자 리뷰도 살펴봤습니다. “직관적이지 않다”, “건강검진 과거 기록이 제대로 입력되어 있지 않다”, “보건소 진료 기록은 조회가 안된다”는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많은 리뷰가 정보가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인식을 담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기록은 있지만 ‘연결’이 없고, 데이터는 있지만 ‘설계’가 없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핀란드와 호주는 10년 이상 헬스 마이데이터를 국가 차원에서 준비하고 운영해 왔습니다. 이들은 기술보다 구조와 철학이 먼저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 헬스 마이데이터 시스템은 공공이 주도하되 국민이 소유하는 구조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2) 병원 중심이 아니라 환자 중심의 통합이 이뤄져야 하며,
(3) 의료기관과 약국, 응급실, 사회복지기관은 물론 해외 진료 상황까지 아우르는 생태계의 연결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핀란드는 2010년부터 ‘Kanta’라는 이름의 통합 시스템을 준비했습니다. ‘Kanta’는 핀란드어로 기반 또는 토대를 뜻하며, 디지털 복지국가의 인프라라는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현재 인구 약 550만 명 전원이 이 시스템을 통해 진료기록, 백신 이력, 영상자료, 사회복지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관리합니다. 환자는 정보 열람 권한을 직접 설정하고, 의료진은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Kanta는 국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핀란드는 EU 국가들과 의료정보 연동을 구현해 해외 진료 시에도 기록이 안전하게 공유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고령자, 만성질환자, 요양시설 이용자의 사회복지 데이터까지 통합해 고령화 사회의 대응 수단으로도 기능합니다. 의료비 절감, 진료 중복 감소, 조기 진단 등 구체적 성과는 수치로 입증되고 있으며, 헬스 마이데이터는 정책이 아닌 일상이 되었습니다.
호주는 2012년 ‘My Health Record’를 도입했고, 2016년부터 전 국민 자동 등록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국민은 진료기록, 처방 내역, 예방접종, 검사 결과를 하나의 플랫폼에서 관리하며, 응급 상황에서도 의료진은 환자의 병력과 알레르기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열람 범위와 접근 권한은 사용자가 설정하며, 데이터의 소유권은 환자에게 있습니다. 이 시스템은 신뢰와 통제권이라는 두 축 위에서 작동합니다.
호주의 또 다른 강점은 민간과의 협업입니다. IBM, Telstra Health, Cerner 등 주요 기술 기업이 플랫폼 설계와 운영, 보안, 사용자 경험 개선 등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방향을 제시하고, 민간은 기술과 실행력을 제공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헬스케어 스타트업과 병원, 약국, 보험사가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하고 생태계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My Health Record’는 헬스 산업 전체를 연결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한국은 데이터 인프라 자체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국민건강보험, 건강검진, 예방접종, 병원 EMR 등 디지털화된 시스템은 이미 갖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데이터를 국민이 통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조는 부재합니다. 기관별로 데이터가 분산돼 있고, 실시간 연동은 어렵고, 민간의 참여도 제한적입니다. 환자는 자신의 건강 정보를 갖고 있으나, 실질적인 통제권은 없습니다.
AI 시대의 의료 기술은 데이터를 중심으로 발전합니다. 의료 AI는 방대한 건강 데이터를 기반으로 작동하며, 데이터의 신뢰성과 실시간성은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됩니다. 어떤 국가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데이터를 통합하고, 환자의 동의와 통제권을 보장할 수 있느냐에 따라 AI 의료 기술의 진보 속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헬스 마이데이터는 선택이 아니라 AI 시대의 주도권을 결정짓는 기반입니다. 지금이 그 체계를 설계할 타이밍입니다.
한국은 초고령사회로 진입 중이며 의료관광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2025년이면 고령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고, 이들의 해외 관광도 꾸준히 증가할 것입니다. 특히, 고령자에게 실시간 건강기록 조회는 필수입니다. 헬스 마이데이터는 의료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이자 국민의 건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장치입니다. 데이터는 병원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어야 하며,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술은 이미 충분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입니다. 핵심은 사용자 중심의 설계, 데이터 주권을 보장하는 제도, 그리고 공공과 민간의 유기적 협력입니다. 건강 데이터는 개인의 삶을 지키는 보호망이자, 국가의 산업 전략과 복지 정책을 떠받치는 기반 자산입니다. 헬스 마이데이터는 더 이상 준비해야 할 미래가 아닙니다. 지금 제대로 설계하지 않으면, 미래는 조용히 우리를 지나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