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런티어가 9·11 이후 CIA를 바꾼 방식
2001년 9월 11일, 미국 정보기관은 사상 최악의 테러를 막지 못한 채 무너졌습니다. 정보는 존재했지만, 위협을 연결하고 해석하는 체계는 부재했습니다. 문제는 정보의 양이 아니라, 구조와 관점이었습니다. 수많은 데이터 조각은 흩어져 있었고, 그 안에 숨은 신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CIA는 데이터만으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내부의 사일로를 깨고, 기술적 감각을 가진 외부 파트너가 필요해졌습니다. ‘민간 기술과의 전략적 동맹’이라는 발상의 전환은 그렇게 시작됐고, 이 결정을 실행한 조직이 바로 인큐텔(In-Q-Tel)이었습니다.
인큐텔은 CIA 산하의 벤처캐피털로, 정부가 필요로 하는 첨단 기술을 스타트업에서 조기에 확보하기 위해 1999년 설립됐습니다. 단순한 투자자가 아닌 전략적 기술 파트너로, 미국 정보기관의 눈과 귀를 넓히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2004년, 팔런티어(Palantir)라는 이름에 주목합니다.
팔런티어는 2003년, 피터 틸, 알렉스 카프, 조 론스데일 등 페이팔 출신 창업자들이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서 설립한 스타트업입니다. 이들은 금융 사기 방지 경험을 바탕으로, 복잡하고 이질적인 데이터를 연결해 의미를 만드는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정보기관이 다루는 세계와 그들이 가진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맞아떨어졌습니다.
그 핵심에는 ‘Ontology’가 있었습니다. 철학에서의 Ontology는 존재의 본질과 관계를 탐구하지만, 팔런티어는 이 개념을 데이터에 적용해, 비정형 데이터를 논리적 구조로 통합하는 방식으로 확장했습니다. 이메일, 통화, 금융, 위치, SNS 데이터를 하나의 관계망으로 묶어, 위협을 감지하고 예측 가능한 패턴으로 전환하는 기술. 정보기관이 오랫동안 꿈꿔온 구조였습니다.
Ontology는 단순한 분류 체계를 넘어, 조직의 판단 방식과 업무 프로세스를 반영하는 ‘의사결정의 맥락’을 구성합니다. 팔런티어는 이를 통해 단순히 데이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위협을 인식하고 조치를 설계할 수 있는 ‘실행형 인텔리전스’를 가능케 했습니다. 이 구조야말로 정보기관이 필요로 했던 두 번째 두뇌였습니다.
인큐텔은 팔런티어에 두 차례 이상 투자하며 약 200만 달러를 집행했고, 피터 틸은 Founders Fund를 통해 3,000만 달러 이상을 추가 투자합니다. 이 자금은 시제품 개발을 넘어, 실전 적용을 위한 기술 정교화에 사용됩니다. 팔런티어는 창업 2년 만에 미국 정보기관의 내부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플랫폼이 바로 Palantir Gotham입니다. 어둠 속에서 위협을 드러낸다는 의미 그대로, 고담은 방대한 비정형 데이터를 통합하고, 실시간으로 관계망을 시각화하며, 분석가가 빠르게 판단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합니다. CIA, FBI, NSA는 이 시스템을 통해 ‘판단의 속도’를 재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팔런티어의 시스템은 드라마 《Person of Interest》의 ‘머신’을 연상시킵니다. 드라마 속 AI는 모든 통신과 영상을 실시간 감시해 잠재적 범죄자와 피해자의 사회보장번호를 제공하고, 인간이 이를 추적합니다. 팔런티어도 유사한 방식으로 ‘관심 인물’의 네트워크, 이동, 금융 흐름을 추적하지만, 결정은 인간 분석가의 손에 남겨둡니다. 기술은 유사하되, 질문은 다릅니다. 하나는 ‘감시로부터 자유를 지킬 수 있는가’, 다른 하나는 ‘데이터로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는가’입니다.
팔런티어는 오사마 빈 라덴 추적 작전에서 그 가치를 입증합니다. 전령의 통신과 이동 기록을 통합 분석해 은신처를 특정했고, 이는 네트워크 기반 위협 추적의 실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팔런티어는 단순한 기술 공급자를 넘어 ‘전략적 의사결정 파트너’로 격상됩니다.
현재 팔런티어는 국방부, 국토안보부, 보건복지부, 팬데믹 대응 시스템까지 기술을 확대 적용하고 있으며, 2024년 기준 연매출은 약 28.7억 달러, 영업이익은 4억 6,220만 달러에 달합니다. 고객 수는 711명, 시가총액은 1,344억 달러로 평가되며, 전체 매출의 60% 이상이 미국 정부 부문에서 발생합니다. 기술보다 시스템, 제품보다 신뢰가 성장의 기반이 된 기업입니다.
팔런티어의 강점은 단순한 분석 툴이 아닌, 인간과 AI가 함께 판단하고, 모든 흐름을 Ontology 위에 구조화해 실행 가능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결정 중심 시스템’에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가정울 해봅니다. 만약 한국의 국정원이나 국방부 정보사령부가 AI 스타트업에 초기 지분을 투자하고, 방대한 비정형 데이터를 실시간 분석해 방첩 업무를 수행한다면 우리는 이런 시스템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신뢰, 통제, 투명성, 그리고 기술. 무엇이 가장 먼저 설계되어야 할지 논의가 필요합니다.
팔런티어는 9·11 이후의 절박함에서 태어났습니다. 놓친 위협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해, 앞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신호를 설계하는 기업으로 진화했습니다. 그들이 바꾼 것은 권력이 아니라, 권력을 움직이는 ‘판단의 구조’였습니다. 기술은 명령하지 않았고, 제안했습니다. 판단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었습니다.
기술은 통제의 수단이 될 수도, 통찰의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질문은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우리는 어떤 기술을 설계하고, 어떤 질문을 허락하고 있나요? 질문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은, 질문할 수 있는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질문은 가장 느린 형태의 자유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형태의 판단은, 가장 구조화된 기술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기술은 충분히 빠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기술이 머무를 수 있는 윤리의 구조입니다. 질문을 품은 기술, 그 기술만이 내일을 설계할 자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