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의 기록' 대신 '흉터의 기록'
2025년 5월 어느 날.
저는 제 첫 책 <디지털 방콕 인사이트> PDF 파일을 구글 노트북LM에 넣어봤습니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정리해줘."
10초 만에 정제된 문장들이 쏟아졌습니다. 제가 3년 넘게 방콕에서 부딪히며 정리한 경험들이 불렛 포인트 7개로 요약되어 있더군요. 심지어 팟캐스트로 정리해준 두 명의 대화가 책 내용을 정확하게 담고 있었습니다.
이 책을 쓰는 데 5년이 걸렸습니다. 초안을 잡고, 지우고 다시 쓰고, 코로나가 터져 미루고, 엔데믹이 선언되어 또 미루고.
그렇게 5년. 한 문장 한 문장에 애정이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10초면 요약됩니다.
그래도 다시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손끝에 닿는 자판의 감촉이 그리웠고, 문장을 한 줄씩 쌓아가는 그 느린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하지만 한동안은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그저 노트북 빈 화면만 펼쳐놓고 있었습니다.
원노트에 메모해두었던 목록들을 다시 읽어봤습니다.
"AI 시대 생존 전략 10가지"
"2026년 10대 AI 트렌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실전 가이드"
챗GPT한테 물어보면 1초 만에 답할 수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제가 쓰려던 모든 주제가 이미 '정답'의 언저리에 있더군요.
어느 밤, 자판을 두드리다 멈췄습니다.
제가 쓴 문장을 챗GPT에 넣어봤습니다.
“이 문장을 더 매끄럽게 다듬어줘."
0.1초 만에 개선된 버전이 나왔습니다. 문법도, 리듬도, 표현도 제 원문보다 나았습니다.
완벽한 정답으로는 AI를 이길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오답이라도 기록해볼까요?
하지만 단순히 '틀린 시도'를 나열하는 건 제게만 의미 있을 뿐, 타인에게는 그저 "이 사람 삽질 일기네" 소리를 들을 것 같았습니다. 남의 성공담 보기도 바쁜 시간에 오답 노트는 더더욱 볼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오래된 메모 하나를 열어봤습니다.
2023년 2월, 뉴욕 출장에서 돌아오던 날 JFK 공항 게이트에서 썼던 메모였습니다.
그날은 미국 법인의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해 팀과 미팅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 터미널 1에서 정전 사태가 났습니다. 전기 패널 고장으로 작은 화재가 나면서 국제선이 전부 꼬였습니다. 공항 측은 "몇 시간만 기다리시면 됩니다"라고 했지만, 결국 6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습니다. 힘든 미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공항마저 이 모양이니, 역시 되는 게 없구나 싶었습니다.
"왜 이렇게 안 풀리지.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네."
그때는 참 비장했습니다. 당시엔 차마 완성하지 못하고 저장만 해둔 글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아, 그때 내가 참 힘들었구나" 싶더군요.
그런데 그냥 그랬구나 정도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니 힘든 기억도 많이 옅어졌더군요.
아 그렇다면, 고통을 극복한 흉터를 지금 시점에서 기록하는게 의미가 있겠구나.
그렇다면, 이 흉터를 포장해서 보여줄까, 아니면 날것으로 보여줄까.
페이스북 COO 출신 셰릴 샌드버그의 <옵션 B>를 다시 펼쳤습니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가 기록한 슬픔과 회복의 과정. 책 속에는 무너지는 장면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사람들이 이 기록을 사서 본 것은 저자가 페이스북 COO 출신이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실리콘밸리 빅테크 경험이 있지도 않기에 제 흉터가 출판사에 선택받을지, 누군가 돈을 내고 살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기록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이 브런치북을 시작합니다. 두 번째 책을 쓰면서, 그 과정을 글로 남겨보기로 했습니다.
문장을 쓰는 순간도, 막히는 순간도, 출판사 편집자가 "이게 뭐야?" 할지도 모를 그 순간도요.
어차피 완성된 책도 10초면 요약될 테니, 차라리 그 10초로는 못 담을 삽질 과정을 기록하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이 기록이 책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남겨봅니다.
누군가에게는 이정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제가 AI에 먹히지 않고 아직은 고민하고 있다는 흔적이라도 남기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