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선정
2025년 12월 4일, 창밖으로 서울에 첫눈이 쏟아졌습니다.
모두가 설렘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날, 저는 모니터 앞에서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습니다.
올 한 해 두 번째 책을 내겠다는 목표 아래 수개월을 고군분투했지만, 정작 단 한 줄의 첫 문장도 확정하지 못한 채였습니다.
눈은 쌓이는데, 문장은 안 쌓이더군요.
처음 제가 붙잡았던 컨셉은 <에이전트 오케스트레이션>이었습니다.
2026년엔 AI 에이전트가 비즈니스의 화두가 될 거라 확신했고, 그에 걸맞은 기술 트렌드 책을 쓰려 했습니다. 야심찬 기획이었죠.
그런데 초고를 쓰다 보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쓴 문장들의 유통기한이 편의점 삼각김밥보다 짧은 겁니다. 어제 쓴 내용이 오늘 이미 구버전이 되어버리는 속도라니요.
이 주제라면 차라리 인스타그램 릴스가 나을 것 같았습니다.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들고, 인쇄하고, 배달하는 동안 정보는 이미 세 번쯤 업데이트되어 있을 테니까요.
기술 트렌드를 쓰려던 사람이 기술의 속도에 추월당하는 아이러니.
첫 번째 컨셉, 과감하게 접었습니다.
한 발 물러나니 비로소 보이더군요.
AI 기술이 미친 듯이 발전하는 이 판에서 정작 중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는 점.
모두가 같은 AI 도구를 쓰게 되면, 결국 차이를 만드는 건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왜, 무엇을 위해 쓰느냐'일 테니까요.
그래서 두 번째 컨셉을 잡았습니다.
<고유함의 기술, 전략 피라미드>
전략 컨설팅 펌에서 익힌 프레임워크를 활용해보기로 했습니다. "왜", "어디서", "어떻게"를 피라미드로 구조화하고, 맨 위에 위치한 "왜"를 통해 본질적 목적과 가치를 발견할 때 '어디서'와 '어떻게'와 조화되어 비로소 인간만의 고유한 색깔이 완성된다는 논리였죠.
AI가 범람하는 시대일수록 인간 고유의 색깔이 중요해질 거라 믿었습니다. 꽤 그럴싸한 기획이었습니다. 적어도 삼각김밥보단 유통기한이 길 것 같았거든요.
그러다 한국은행 보고서를 읽었습니다.
ChatGPT가 출시된 2022년 11월과 2025년 7월을 비교했더니, AI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업종 두 곳이 나왔습니다. IT 정보 서비스업의 청년 고용은 23.8% 감소했고, 출판업은 20.4% 감소했습니다.
잠깐.
저는 IT 업계에서 일하면서 지금 책 출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있는 일 두 개가 AI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분야 1, 2위였던 겁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제가 '고유함'을 말하는 동안, 당장 나부터 밥벌이 걱정을 해야 한다는 것을요. 생존이 급박한 현실에서 "당신만의 색깔을 찾으세요" 같은 소리는 얼마나 한가하게 들릴까요.
집이 불타는데 인테리어 조언을 하는 격이었습니다.
두 번째 컨셉도 접기로 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결정타는 어느 편집자의 이 한마디였습니다.
정보로서의 책은 이미 수명을 다했다는 진단. 실제로 장강명 작가의 신간이 4만원 가까이 출판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솔직히 복잡했습니다. 대단한 숫자지만, 동시에 '검증된 이름 있는 작가의 책도 5만 권, 10만 권이 채 안 되는구나' 싶기도 했거든요.
현재 출판 시장에서 정보의 가치는 급속도로 하락하고 있습니다.
챗GPT한테 "이 기사 3줄 요약해줘" 하면 1초 만에 답이 나오는데, 누가 그 내용에 19,000원을 낼까요?
게다가 요즘 독자들은 숏폼에 지쳐서 '도파민 디톡스'를 외치고, 거창한 담론보다는 '나노 재테크' 같은 초개인화 팁만 찾습니다.
아, 그리고 'AI 인문학'이라는 새 장르도 생겼더군요. 인간다움을 지키는 공존의 지혜를 담았다는데...
잠깐, 제가 지금 나열한 이 트렌드 용어들도 2026년에는 낡은 정보 아닐까요?
어느새 저는 첫 번째 컨셉을 포기했던 바로 그 이유, 정보의 짧은 유통기한 앞에 다시 서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 제가 지금까지 계속 '정보'를 정제해서 쓰려고 했구나.
첫 번째 컨셉에선 기술 '정보'를, 두 번째 컨셉에선 전략 '정보'를.
AI가 1초 만에 복제 가능한 '지식'을 가지고 '고유함'을 주장했던 겁니다. 피라미드고 뭐고 간에, 결국 그게 다 데이터로 환원되면 끝이었던 거죠.
그렇다면 2026년 독자들이 기꺼이 돈을 낼 만한 건 뭘까요?
답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AI한테 없는 거요. AI가 학습할 수 없는 거요.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사람만이 겪은 구체적 경험'이었습니다.
확신이 들었다기보다는, 당연한 얘기를 엄청 돌아서 깨달은 겁니다. 마치 집 앞 편의점 찾으려고 내비 켜고 한 바퀴 돈 기분이랄까요.
그래서 결정했습니다.
이 책에서 '정보'는 과감히 버리기로요. 대신 제가 실제로 경험한 걸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거창한 솔루션 같은 건 없습니다.
2025년 12월, 첫눈 내리는 날 모니터 앞에서 커서만 깜빡이던 한 사람의 기록이 전부입니다.
누군가에겐 "그래서 뭐?" 할 수 있는 내용이겠죠.
하지만 어쩌면 비슷한 막막함 앞에 선 누군가에겐, 챗GPT가 절대 생성 못 할 종류의 위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 나만 이렇게 헤매는 거 아니었구나."
창밖의 눈은 벌써 반쯤 녹았습니다.
한국은행, 「AI 확산과 청년고용 위축: 연공편향(seniority-biased) 기술변화를 중심으로」, BOK 이슈노트 제2025-30호, 2025. https://www.bok.or.kr/portal/bbs/P0002353/view.do?nttId=10094258&menuNo=200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