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선정
매년 초가 되면 의례적으로 <트렌드 코리아>를 봅니다.
올해도 Yes24를 켰습니다. 노트북 화면을 둘로 나눴습니다. 왼쪽에는 <트렌드 코리아 2014>, 오른쪽에는 <트렌드 코리아 2026>. 두 권 모두 '말의 해'에 나온 책입니다.
왼쪽: Dark Horse (숨은 실력자)
오른쪽: Horse Power (마력, 에너지)
12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말’이 완전히 다른 의미로 변했습니다.
목차를 비교해 봅니다.
2014년 → 2026년:
스웨그의 가벼움(Dear, got swag?) → 필코노미(Feelconomy, 기분 기반 소비)
초니치(Read between the ultra-niches) → 가격 디코딩(가격표는 물음표)
예정된 우연(Surprise me, guys!) → 레디코어(Ready-core, 예행연습 문화)
단어만 보더라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2014년으로 돌아가 봅니다.
미국에서 몇 년 살다가 막 한국으로 돌아온 시기였습니다. 인천공항에 내렸을때 그 청결함이란. '역시 한국이 좋구나.' 빠른 인터넷, 24시간 편의점, 새벽 배송.
미국의 속터지는 느린 행정과 비교하면 한국은 완벽했습니다.
그 당시는 "초니치" 전략이 유행하던 때였습니다.
"틈새의 틈새를 공략해야 합니다. 올리브영을 보세요. 화장품만 파는 게 아니라 색조, 기초, 남성용, 유기농... 카테고리를 무한 세분화하고 있습니다. 다변화된 수요를 만족시켜주는 이커머스와 카테고리 킬러샵. 이게 미래입니다."
그해 한국 면세점 매출은 전 세계 1, 2위를 찍었습니다. 명동은 중국 관광객으로 넘쳐났고, 직구 열풍이 불었습니다. 소비가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던 때였습니다.
오른쪽 화면으로 시선을 옮겨 봅니다.
<트렌드 코리아 2026>.
"필코노미(Feelconomy)"
이제 소비 기준은 ‘기분'입니다. ’오늘 기분이 안 좋아서 빵을 샀어"가 이제는 정당한 소비 이유입니다.
2014년에는 ROI를 따졌습니다. 이 상품을 기획하면 매출이 몇 %나 오를까. 숫자로 증명 가능한 것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2026년에는 "기분"입니다. 증명할 수 없지만, 유일하게 중요한 것.
다음 키워드: "가격 디코딩"
가격표는 더 이상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입니다. 브랜드가 "100만원."이라고 찍으면, 소비자가 "100만원?"이라고 되묻습니다.
2014년 성장 시기 제품 다변화를 통해 다양한 니즈 충족이 중요했다면 이제 소비자는 내 마음에 드는 1개를 찾아 다닙니다. 왜 그 가격인지, 어떤 기분으로 소비하는지도 중요하구요.
“레디코어(Ready-core)"
2014년 "예정된 우연"은 예상 밖의 일을 기대했습니다. 우연을 즐기고, 깜짝 선물에 환호하던 시절.
2026년 "레디코어"는 예상 밖의 일을 예행연습합니다. 모두 지친 마음에 서프라이즈 파티를 싫어합니다.
엑셀을 열었습니다.
12년간의 수치 변화를 정리하며, 숫자가 상징하는 바를 살펴봅니다.
2014년 → 2026년:
경제성장률: 3.3% → 0.97% (2025년)
1인당 GDP: $28,180 → $36,107 (2025년)
코스피 지수: 1,940pt (2024년 1월 29일) → 5,224pt (2026년 1월 23일)
경제성장률은 쪼그라들었는데, 1인당 소득은 늘었고, 주가는 2.5배 올랐습니다.
합계출산율: 1.205명 → 0.8명 (2025년 추정)
65세 이상 인구: 12.7% → 20.3% (2025년, 초고령사회 진입)
아이는 줄고, 노인은 늘고 있습니다.
평균소비성향: 73.6% → 70.3% (2024년)
면세점: 전 세계 1, 2위 → 롯데·신라·신세계·현대 4개 모두 희망퇴직
이제 모두 지갑을 닫고 있고, 희망퇴직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확장에서 압축으로. 12년 만에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그러고 보니 또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2014년, 용건이 있으면 전화부터 했습니다. 하지만, 2026년에는 용건이 있으면 카톡이나 DM부터 보냅니다. 음성 통화는 "긴급"할 때만 쓰는 용도로 변화되었습니다.
말하기에서 쓰기로. 목소리에서 문자로.
이것도 압축입니다.
통화 5분을 문자 30초로 압축하는.
'말의 해'가 돌아온 지난 12년간, 키워드는 바뀌었습니다.
숨은 실력자에서 그냥 버티는 힘으로.
확장에서 압축으로.
희망에서 생존으로..
이제 ‘더 높이, 더 멀리'라는 도약의 서사는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멈춰 선 듯한 저성장의 파고 속에서 생존의 에너지는 화려한 성공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힘, 바로 ‘끝까지 버티는 힘’입니다.
이제 더 이상 외부의 차가운 숫자나 효율의 잣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세밀한 만족, 그리고 이 고통스러운 과정이 왜 개인에게 가치 있는지 스스로 납득하는 시간이 더 중요합니다.
희망이 희미해질수록, 끝까지 ‘버티는 힘’을 채워 넣오야 합니다.
다시 ‘흉터’의 이야기로 돌아 옵니다. 흉터는 아픔의 시간을 통과한 뒤에야 얻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의 증거입니다.
완벽한 정답보다 투박한 흉터가 더 강력한 서사가 되는 시대.
아마도 독자들은 서사로 포장된 솔직한 흉터에 그나마 지갑을 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