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가 달라졌습니다.

입니다 와 이다

by 경영로스팅

주어를 안 써도 되는 언어에서 20년을 살았습니다.


"매출이 하락했습니다." "조직 개편이 필요합니다." "시장 환경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현상을 정리하고, 시사점을 뽑고, 대응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수천 장의 보고서 어디에도 '나는'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제 문장을 써야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편의점에서 제로 펩시 1.25리터를 1+1으로 사들고 책상에 앉았습니다. 노트북을 열고 '나는'이라고 쳤습니다. 커서가 깜빡였습니다.


보고서라면 30분에 두 장을 뽑는 사람이, '나는' 다음 두 글자를 못 쳤습니다. 글쓰기를 20년 했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했던 건 글쓰기가 아니라 정리였습니다.




제로 펩시 한 병을 다 마셨습니다. 화면에는 여전히 '나는'만 남아 있었습니다.


'~입니다'로 써봤습니다.


"저는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도전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읽어보니 퇴사 인사 메일이었습니다.


주어를 넣었는데도 내가 없었습니다. '저는'이라고 썼을 뿐, 그 뒤에 붙는 문장은 전부 조직의 문법이었습니다. 상황 정리, 원인 분석, 향후 계획. 결재란만 빠진 보고서였습니다.




'~이다'로 바꿔봤습니다.


"나는 바닥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러나 나는 일어설 것이다."


읽어보니 자서전이었습니다. 아직 일어서지도 않은 사람이 벌써 일어선 사람처럼 쓰고 있었습니다. 비참한데 멋있는 척. 그게 가능한 문체가 '~이다'였습니다.


밤새 쓴 독백을 아침에 다시 읽으면 얼굴이 뜨거웠습니다.




다시 '~입니다'로 돌아왔습니다.


다만 규칙을 하나 정했습니다. 형용사를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힘들었습니다"를 쓰려다 멈췄습니다. 대신 그날 있었던 일을 썼습니다. "편의점에서 제로 펩시 1.25리터를 1+1으로 샀습니다."


형용사를 빼니까 시사점을 뽑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을 나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년 동안 문장에서 나를 생략했는데, 형용사를 생략하니까 오히려 내가 나타났습니다.




아직 서툽니다.


밤에 쓰면 자기 연민이 끼고, 아침에 읽으면 절반을 지웁니다. 지우고 나면 두세 줄이 남습니다.


그래서 문체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이다'로.


'입니다'로 쓰면 보고를 합니다. '이다'로 쓰면 고백을 합니다. 지금은 보고할 곳이 없었습니다.




1+1으로 받은 두 번째 펩시가 책상 위에 있었습니다. 뚜껑을 열었습니다. 김이 빠져 있었습니다.


마셨습니다.


다음 문장은 '나는'으로 시작하되, 마침표는 '이다'로 찍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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