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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Jun 14. 2024

방리유 라이프

파리 바깥의 삶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는 이런 묘사가 나온다. 

'경기도는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집이 멀어 서울에 사는 여자와 연애가 잘 굴러가지 않는 창희가 여자친구의 말을 울분에 차 뱉은 대사였다. 노른자 서울과 경기도, 그리고 경기도에 사는 사람을 경기도민이라고 하듯이 프랑스에도 수도 파리와 파리를 동그랗게 겹겹이 둘러싼 파리 외곽의 도시들, 즉 방리유(Banlieue)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이 방리유는 두 가지 사전적 의미를 지니는데, 첫 번째는 교외 혹은 대도시의 외곽, 두 번째는 아프리카인들과 무슬림 같은 이민자들이 대거 밀집해 거주하는 지역을 의미하기도 한다. 파리 수도권 인구의 80퍼센트가 이 방리유에 거주하고 있고, 한국의 경기도처럼 다소 낙후된 지역과 소득이 높은 지역 등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과는 비교 불가한 지점이 있는데 바로 프랑스는 이민자의 비율이 2021년 기준 10.3퍼센트에 해당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민자의 42퍼센트가 바로 이 방리유에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프랑스 하면 '파리'를 우선 떠올릴 것이다. 프랑스에 오기 전에 나도 그랬으니까. 에펠탑과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 그리고 색색의 과일과 꽃으로 물든 시장의 풍경, 바게트를 옆구리에 끼고 걸어가는 파리지앵들. 노천카페에 자리를 다닥다닥 붙이고 앉아 햇살을 쬐며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상상만 해도 행복해진다. 온 세상의 낭만이란 것들은 다 그곳에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삶이란 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아닌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악사가 어디에 사는지 우리는 모른다. 색색의 아름다운 과일과 꽃들이 파리 외곽 Rungis(도시 이름)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오는지 우리가 다 알 필요는 없다. 다만 햇살이 닿는 곳뿐만 아니라 그늘진 곳에도 눅진한 삶의 이야기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파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 파리를 동그랗게 에워싸는 외곽순환도로를 지나면 파리에서 보았던 웅장한 오스만 양식의 건축물 대신 수많은 메종(Maison, 단독주택)과 줄지은 잿빛의 고층 아파트들이 등장하는데 이 풍경의 변화가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 RER(수도권 고속 전철)로 파리까지 불과 20-40분이면 도달하는데 어째서 파리와 그 바깥의 삶의 양식은 이토록 다른 것일까. 파리 안의 사람들은 바깥의 세계에 관심이 있을까. 이어 물음은 이렇게 귀결된다. 한국과 프랑스 어느 나라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해 스스로를 경계인이라고 생각했던 나, 그런데 이제 파리 밖으로 나오기까지 했다. 방리유에 사는 이민자가 된 셈이다. 그런데 또 아주 소수 인종이다. 나는, 무엇일까.


파리 안에서는 32제곱미터의 좁아터진 집에서 남편과 강아지 한 마리, 이렇게 셋이 살았다. 집 바로 앞에는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대학 병원과 의과 대학, 그리고 경찰서가 있어서 밤에도 안전한 동네였다. 언뜻 들으면 완벽하기 그지없는 환경인 이 집이 지옥처럼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큰 대학 병원이 있다는 말은 밤, 낮 할 것 없이 24시간 내내 응급차 사이렌 소리와 응급 헬기 소음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었고, 경찰서 역시 출동하는 경찰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 창문을 열고 생활해야 했던 한여름엔 남편과 나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집 안에서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대화를 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출근을 하고 난 뒤 혼자 집에 남겨진 개가 하루종일 짖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랫집 이웃으로부터 항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하필 아랫집 이웃이 출판사였다. 종일 원고를 읽고 편집하는 출판사 입장에서 쉬지 않고 짖어제끼는 개소리가 얼마나 스트레스였을지 상상이 되었다. 항의 편지를 세 통째 받은 날, 남편과 나는 결심을 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숲 하이킹과 공원 산책을 좋아하는 우리였으니까 이사의 목적지는 당연히 파리 바깥이 되었다. 어차피 파리에서는 스튜디오나 방 하나짜리 아파트 밖에 살 수 있는 여력이 안 되었기 때문에, 좀 더 넓고 자연환경이 좋은 곳으로 고르다 보니 파리에서 26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나는 다소 충동적인 면이 있고 예민한 성격과 다르게 또 어떤 부분은 별생각 없이 넘겨버려서, 치밀하고 계획적인 남편과 집의 위치를 결정할 때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구입한 집이 남편 직장으로부터 차로 10분 거리, 내 직장으로부터는 RER과 지하철을 갈아타고 또 몇 분 걸어야 하는 길고 긴 여정에도 불구하고 "뭐, 나는 매일 출근 안 하니까 괜찮아."하고 쉽게 넘겨버린 것이다. 그게 미래에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줄지도 모르고... 아둔했던 나여.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자초하여 시작된 방리유의 삶, 우왕좌왕하는 가운데서도 나를 아주 조금씩 나아가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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