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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째 생신, 축하드려야 하나요?

by 냉이꽃


어머니가 드실 수도 없고, 잘 듣지도 보지도 못하시는데, 생일 행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ㅠ


100번째 생신을 맞이하게 된 어르신이 계십니다. 그 아드님이 이런 문자를 보내왔습니다.

"엄마! 엄마! 막내아들 왔어!" 하며 우시던 지극한 아드님이었습니다.

그러나 100회 생신을 축하드리자는 저희들의 제안에 선뜻 응하질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실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00회 생신을 축하드리려는 우리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돌아봤습니다.


- 누구 좋으라고 하는 행사일까?

- 정작 어르신은 인지도 없으신데... 우리 마음 편하자고 하는 짓일까?

- "우리 병원, 이렇게 잘하고 있어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병원 수발을 수년에 걸쳐 하고 있는 가족들인데.. 너무 오래 사셔서 걱정이 태산일지도 모르는데... 그 복잡한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경사스러운 잔치 하자고 나댄 것일까?


IMG_7624.JPG 떠들썩한 생신 잔치는 지양했습니다.


어르신이 살아오신 100년의 세월을 되짚어 봤습니다.


어르신은 뒤숭숭한 세월에 태어났습니다. 기미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수많은 젊은이가 만주로 떠나던 해였죠.어르신의 10대 시절에는 만주에 있건 국내에 있건, 무장 독림 운동을 하건 단지 끼니를 걱정하며 근근이 살건, 춥고 배고프고 무섭고 혹독했던 사정은 누구에게나 비슷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말도 못 하고 듣지도 못하는 분에게 그 시절을 어떻게 살았냐고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IMG_7615.JPG 유리창 너머에 어르신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어르신의 20대는 1940년대였습니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꿔야 했고, 일본말을 쓰지 않으면 뺨을 맞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소년들은 전쟁터로, 소녀들은 정신대로 동원되었죠.


교장선생님이셨던 어느 어르신이 <말모이>라는 영화를 보던 날 얘기해주셨습니다.


그때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선전을 했어. 정신대에 가면 공부도 시켜주고 취직도 시켜준다 해서 우리 반 아이들이 모두 손뼉 치고 아주 난리였어. 너도 나도 간다 했지. 다 가자 가자 했어!

선생님이 부모님 허락만 받아오면 된다고 해서 집에 가서 부모님께 말했다가 아버지한테 매를 엄청시리 맞았어. 다른 애들도 부모님에게 다 혼나고 두들겨 맞고 왔었어. 우리 반에서는 딱 한 명이 정신대를 지원했어. 그런 덴 지 우리는 몰랐지...

정*주 어르신의 회고


IMG_7722.JPG 원장님이 생신 선물인 한약 박스를 열어 보이시네요.


1945년, 어린 나이에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어서 광복을 맞이했으나

여전히 먹고사는 일이 전부였고 힘겨웠던 시절을 살았습니다.

1950년, 나이 서른에 주렁주렁 달린 새끼들을 데리고 한국전쟁의 틈바구니를 살아 내셨죠.


전쟁은 생각도 하기 싫고, 전쟁 영화도 보기 싫다는 한 어르신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 시절은 생각도 하기 싫어.
<국제시장> 영화 봤어? 흥남부두 그 배가 내가 탔던 배야. 딱 그대로야.

빈 손으로 부산에 와서 고생한 거는 말로 다 못해. 배가 고파서 밥 한 그릇 먹는 게 소원이었어.
먹고 산다고 학교를 못 다닌 게 원이고 한이야.
겨우 먹고살 만하니까 나는 병신이 되어 병원 신세나 지고...

박*자 어르신


IMG_7695.JPG 어르신들이 침쟁이라 부르는 한의사들



'생일 축하합니다' 왁자하게 손뼉 치며 노래 부르고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그런 날이 아니었습니다.

100년 세월을 살아온 것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날이 되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언젠가부터 부르게 된 생일 축하 노래도 부르긴 했지만

무엇보다 한 목소리로 어버이날 노래를 불렀습니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직원들과 자손들이 모두 엎드려 큰 절도 올렸습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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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큰 절을 올렸습니다


나를 낳아준 내 어머니라서 고마운 것만도 아니고

나를 특별히 이뻐해 주신 어머니라서 더 고마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툰 사람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고 살았으니

어쩌면 우리 엄마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이 있었을 수도 있고

부모 또한 어느 순간, 저런 웬수가 왜 내 자식이 되었나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모질게 상처 준 사람이 누구도 아닌 엄마였을 수도 있고

내 인생을 가로막은 사람이 엄마라고 믿어질 수도 있죠.

그러나 100년의 의미는 그런 차원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살았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시대를 견디고 오신 분들이었습니다.

너무나 어린 나이에 두렵고 고달픈 모든 것을 감수하신 분들입니다.

그 덕에 수많은 자식들이 오늘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세월에 경의를 표하는 큰 절을 우리는 올렸습니다.



IMG_7737.JPG 100년을 살아내신 어르신


언택트 시대가 길어지고, 어제는 우리 지역에서도 처음으로 확진자가 생겼습니다.

비접촉 면회조차도 언제 중단될지 모르고, 사정은 있겠지만 면회를 오지 않는 가족들도 꽤 많습니다.

어르신들이 직접 접하는 사람은 우리 직원이 전부인 것입니다.

내 부모, 남의 부모를 구분할 시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은 우리들의 부모입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르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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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신은 간단하게 할 테니 그냥 오시라 하긴 했지만, 가족들은 정말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생신 축하드릴 기분이 진짜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를 잡수셔도 듣는다 생각하고, 눈을 감으셔도 들으시고, 치매가 심해져도 알건 다 안다 생각하고 케어하는 곳이 요양병원입니다. 인지가 있는 사람들은 들리니까 듣는다 생각하지만, 보이니까 본다고 생각하지만, 생각하니까 다 아는 척을 합니다만, 뭘 어떻게 알고 안다고 하는지는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드러나는 것이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저희들이 굳이 생신잔치를 밀어붙인 이유였습니다. "어르신은 분명 아실 거야..."


다행히 설명하지 않아도 아드님은 아셨습니다. 철없이 팡파르 울리자고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100년의 세월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는 자리였음을 충분히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아드님은 우셨습니다.


엄마! 엄마! 고생했어, 살아줘서 고마워!


아드님은 몇 번이고 고맙다 하시고 또 고맙다는 문자를 보내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문자가 왔습니다. 손바닥만 한 생신 카드를 귀히 여겨주시는 마음이 눈물 나게 고마웠습니다.


어제 전해주신 소중한 어머니 생신 카드를 방역복 벗으면서 그곳에 놓고 정신없이 가느라 챙기지를 못했어요. 찾아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음번 면회 갈 때 가져오면 좋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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