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은 다르지 않다
도끼를 들고 명상하고 있는 브론즈 작품이다. 이 소년이 힌두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는 모른다. 단지 옥스퍼드 대학의 애쉬 몰린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너무나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찬디케스와라이다. 그는 링가 Linga (시바신의 상징인 남근상)를 만들고 명상을 했다 한다. 이 꼴을 보고 화가 난 그의 아버지가 링가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소년은 그의 신을 모독한 아버지의 발을 도끼로 잘라버렸다. 이때 링가 상으로부터 시바신이 현신한다. 시바신은 아버지의 발도 돌려주고 소년에게 축복을 내려 자기의 신전에 영원히 거처할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한다.
이는 힌두교의 대표적인 삼신 중 한 명인 시바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처럼 보였다.
시바신은 파괴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찬디케스와라 설화를 통해 시바의 파괴가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 엿볼 수 있었다. 시바가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관습과 배타적인 관념이다. 시바의 축복은 그 파괴 위에 내려졌다.
시바신은 또한 푸른 색깔로 그려진다. 한 방울만 떨어져도 세상이 멸망하는 독을 자신이 대신 받아먹었기 때문이라 한다. 어떻든 인간의 삶 가까이에 있는 시바는 목숨을 던져 세상을 지킨 신이라 할 수 있다. 시바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했던 것이 뭘까? 시바신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은 그걸 아는 것일까?
이 이야기는 불교에서의 지장보살을 생각나게 한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빠진 중생의 구제를 위해 부처가 되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지옥으로 간 분이기 때문이다. 고마운 분들이지만 고마운 걸로 그치는 것이 인간인 것 같다. 당신은 고마운 신이시니 나에게도 고맙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 신앙인가 싶기도 하다.
너무나 방대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 힌두교와 인도의 모습이다. 기원전부터 시작된 힌두교는 종교라기보다 인도인들의 삶의 방식으로 내면화되어 있다. 그 역사는 오래되었고 인도의 신은 셀 수 없이 많다. 힌두교는 다신교적 일신교다. 관대함 속에서 만들어진 그 많은 신들은 하나의 원리로 이해된다고 한다.
기본적인 상식만 소개하자면 힌두교의 가장 중요한 삼신은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라 한다.
브라흐마는 힌두교 최고의 신이며 우주 창조의 신이다. 네 개의 얼굴과 네 개의 팔이 있고 사람들의 소망에 따라 3억 가지가 넘는 모습으로 변신한다 한다. 비슈누는 우주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신이다. 비슈누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아바타라 한다. 힌두교는 불교의 석가모니도 비슈누의 아바타 중 하나로 이해한다. 그리고 시바신은 우주를 소멸시킨다. 시바가 춤을 추면 세상은 파괴된다 한다. 낡은 우주는 파괴되고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 속에서 명상의 나라 인도는 무엇을 화두로 명상을 하였을까. 우주의 근원인 신의 세계와 합일하고 만물에 스며있는 브라만을 찾기 위해 인간 속에 잠자고 있는 영적 에너지를 깨우는 것이 힌두교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수단이 요가와 명상이다.
한국에 많이 소개된 힌두교 명상가는 순수의식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크리슈나무르티, 기존 질서를 포기하고 새로운 공동체 생활을 주장하는 라즈니쉬, 금욕과 명상을 통한 초월명상을 말하는 신비주의자 마하리쉬 등이다.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검색한 결과다.
지금 뉴욕의 젊은이들은 요가와 명상을 바탕으로 한 힌두교 문화를 가장 세련된 문화로 평가한다는 말도 있다.
그중 초월명상은 1955년 위대한 선지자를 뜻하는 마하리쉬에 의해 체계화되어 보급되었다 한다. 비틀즈는 1967년, 마약을 하지 않아도 초월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권유에 초월 명상을 하였고 Imagine같은 명곡을 만들어냈다.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도 초월명상을 한다고 알려졌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에 이끌린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은 자발적으로 본성의 자리로 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힘들이지 않고 순수한 고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 초월명상의 입장이다. 초월명상은 어떤 것에 관해서도 명상하지 않는다 한다. 마하리쉬는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묵상이라 정의한다. 그것은 계속 생각하는 것이고 새로운 의미를 마주할 뿐이라 말한다. 묵상이 연못의 표면을 수영하는 것이라면 초월명상은 연못 깊숙이 다이빙하는 것과 같다 한다.
마하리쉬는 초월명상은 무엇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 아니며 지적인 과정이 아니라 기술적으로 직접 인식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전문 지도자에 의해 전수될 수 있는 민감하고 섬세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더 자세히 알려줄 수는 없으며, 직접 해봐야 하는 것이다. 만트라라는 주문을 외워서 뇌의 공명을 일으키고 이것이 근본 영역을 개발하게 된다고 알려져 있는 정도다.
고대로부터 인간에게 명상은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명상은 왜 하는 것일까?
명상에 대해 보도하던 어떤 미국 방송인은 인간은 끊임없이 더 높은 의식의 단계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했다. 많은 명상가들이 신의 경지인 법열에 들기 위해 수행처를 찾아 명상을 한다. 또 많은 이들이 볼거리를 찾는 여행이나 관광보다는 보다 본질적인 의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에 나서기도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명상을 찾는 이유도 검색해 보았다. 현실적으로 당장의 스트레스 해소가 급해 보였다. 길게는 삶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잠재능력의 개발, 이른바 창의력 집중력 직관력 통찰력 그런 것이다. 그리하여 얻은 마음의 평정은 대인관계와 건강문제의 개선을 가져온다. 그래서 명상을 찾고 명상을 하는 것 같다.
나아가 궁극적인 깨달음에 대한 욕구는 삶에 가려져 있을 뿐 인간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본능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자.
명상은 좋은 것이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굳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명상을 찾았던 것은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깨닫고 싶었고, 알고 싶었고, 뭔가 꿰뚫어 보는 눈이 생기기를 바랬다. 마음수련 명상을 하면서 명상조차도 우월함을 얻기위한, 아니 나의 열등감을 만회하기 위한 욕심으로 했음을 알게된 것이다.
나의 인간됨은 부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먼저 인간이 되고 싶다. 잘못한 사람에게 잘못했다 할 수 있는 용기가 있고, 고마운 사람에게 고맙다 할 수 있는 겸허함을 가진 존재가 되고 싶다. 나는 이율배반적이고 모순된 나를 보며 항상 고통스러웠다. 채근담을 읽고 성경도 불경도 읽고 그럴듯한 말은 좋아 하지만 글로 아는 것과 너무나 거리가 먼, 낳아준 부모도 귀찮아하는 내 꼴은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드높은 삶의 목표는 나의 짐이었다. 제대로 이고 가지도 못할 이 짐을 내려놓고 나는 먼저 인간이 되고 싶다. 불행했던 내 인생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과 화해를 하고 오해도 풀면 좋겠다. 이 아까운 인생, 그만 싸웠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