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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냉이꽃 Jun 27. 2018

죽음, 외면해도 될까?

질 높은 삶을 위한 마음수련 명상



좀 엽기적인 이야기


오래전 시골에서 닭 잡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닭 모가지를 잘랐는데 머리 잘린 닭은 뛰어다녔고 잘린 모가지는 눈을 번쩍 떴다. 나는 기겁을 하고 울었고  닭잡던 총각은 주인에게 혼이 났다.

신경이 살아있어 움직였지만 닭은 분명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 것이고 죽은 것이다. 대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의식의 죽음


전신마취를 하고 8시간 동안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마취주사를 놓는 순간부터 깨어나기까지는 나에게 사라진 시간이다. 수술방의 8시간은 의료진의 의식에서만 존재하는 일이다. 나에게는 슬픔도 두려움도 지루함도 인간의 그 어떤 의식의 움직임도 없었다. 뇌사도 아니고 심장도 뛰고 있었지만 8시간 동안 육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르고 꿰매는 그 어떤 것도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식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잠자는 순간에도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죽어있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사람의 삶과 죽음은 의식의 있고 없고에 따른 문제일까? 아, 이건 너무 어렵다.

 


사회적 죽음


긴 수술의 결과 나는 한동안 음성을 잃었다. 말이라는 수단을 잃은 나는 직장도 사표를 냈다. 

누가 물어도 대답을 할 수 없고 저 앞에 아는 사람이 걸어가고 있어도 부를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부탁도 할 수 없고 무례한 사람에게 항의도 할 수 없었다. 말을 잃은 나는 이 사회에서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길 한가운데 서 있어도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 관계망을 잃은 존재, 이것이 죽음이라고 느껴졌다.


인간에게는 죽음이 두개다. 하나는 사회적 죽음, 또 하나는 생물학적 죽음



39 keys from the collection of Emmanuel Vita Israël, anonymous, 1750 - 1800



죽음에 대한 막연한 기대


며칠 전에 어느 정치인이 돌아가셨다. 뉴스 진행자는 먼저 간 부인 곁으로 갔다고 말했다. 나의 모친도 아버지 곁으로 간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은 바램일 뿐, 누구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렇게 믿는 것이 속편하니 기정사실화 시켜버리는 것일까. 믿고 싶은 대로 무작정 믿는 것이야말로 존재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은 아닐까. 


죽음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는 무성한 추측에 불과하며 먼저 죽은 자를 만난다는 증거도 없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몰라야 하는 것이고 알아도 소용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알건 모르건 사람은 대개 자신의 죽음만큼은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일도 나는 살아있을 거라 믿고 준비를 하고 계획을 하고 약속을 한다. 나는 왜 죽음에서 자유로운 척, 나와는 상관없는 척했을까? 죽음에 겁을 먹는 것은 오히려 피하기 때문이 아닐까?  


죽음은 철저한 개인의 과제이다. 누구도 도울 수가 없고 경험도 학습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문제는 우리 몫이다. 그 태도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때로는 엄청나게. 그래서일까. 죽음은 너무나 우리 가까이 있고, 곳곳에서 우리와의 대화를 시도했다. 



죽음의 개방


어떤 실험을 본 적이 있다. A 집단의 어린이에게는 신데렐라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만약 나의 엄마가 죽으면 어떨 것 같은지 얘기를 하게 했다. B집단의 어린이는 즐겁게 노래하고 놀게 했다. 그리고 게임을 했다.  B집단은 사탕을 뺏거나 때리거나 했고  A 집단은 사탕을 주거나 악수를 했다. 죽음에 개방된 집단이 배려와 협동의 수준이 3배나 높았다. 삶의 질이 높아진 것이다.


수세기 동안 끈질기고 광범위하게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던 네덜란드는 행복지수가 매우 높다. 특히 아동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부유한 29개국 중에서 1위였다. 죽음의 문제를 직시해서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는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지 않는 용기를 그들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슬프게도 한국 청소년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꼴찌를 기록했고 청소년 자살률은 1위를 기록했다. (참고 : 2017년 자료. http://www.benefit.is/18384)


그 외에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집단은 오히려 행복감이 증대하고 우울감이 낮아지며 죽음에 대한 공포도 사라진다고 학자들은 보고한다. 죽는다는 사실은 회피할 문제가 아니라 이해해야 할 문제다. 죽음을 이해하는 일은 삶을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마음수련 명상을 하면서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음수련 명상은 먼저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중요한 것은 돌아보는 관점이다. 내가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삶을 돌아보면 모든 문제가 명확해진다. 이것은 반드시 죽기 전에 해야할 일이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 마시라. 죽음을 넘어선 삶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참고작품 

https://www.rijksmuseum.n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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