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몰라병

오늘 깨달음을 얻었으나 실천은 내일의 나에게

by 중년의 모험가

21년 이맘때쯤, 7년간의 외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해외 이삿짐이라 양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여러 차례 골랐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은 너무 많았다. 돌아와서도 1년 넘게 풀지 않은 박스가 여럿 있었고, 결국 24년 가을이 돼서야 겨우 대부분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일부는 과감하게 버렸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박스 속에 고이 모셔져 있다.


물건을 정리해야 한다고 마음속으론 생각하면서도, 만일 다시 필요하게 될 상황이 생길까 하는 걱정에 쉽게 버리지 못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혹시 몰라’ 모든 것을 준비해두는 상황이다.


대표적으로 쟁여두는 물건중 하나를 예로 든다면 충전용 케이블이라 할수 있겠다. 비슷한 길이와 규격의 케이블들을 이삿짐 속에서 발견할 때마다 한곳에 모아두고, 언젠가 꼭 필요한 것만 남기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막상 정리를 시도하면, 모두 나름의 쓸모가 있을 것 같아 결국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게 된다.


이러한 행동은 쇼핑중독이나 저장 강박증과는 다른 면이 있다. ‘혹시 몰라’라는 마음에서 결핍에 대한 불안이나 예비 행동의 일종으로서 물건을 소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속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이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나 자신에게 ‘혹시 몰라’ 물건을 쌓아두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 한두 개의 예비품만 두어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물건이 여러 개 있음에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미래에 예상치 못한 불안 때문인것은 아닌 듯하다. 뭔가 부족하게 살아 본적은 없으니 과거의 결핍이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걱정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모은 물건들이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두는 것을 보면. 물질적 풍요나 안정감을 위한 것도 아니며, 아마 다시 구하려면 드는 비용이나 손쉽지 않은 번거로움에 대한 불안감과 귀찮음이 더 크지 않을까 싶다.


귀찮음의 다른 예가 또 있는데 요즘은 정장을 입지 않고 회사에 다니다보니 아주 예전에 산 오래된 정장이 그대로 있는데, 오래되어 왠지 촌스러워 보이는 정장을 보며 버릴지 말지 고민할 때도 있다. 그러나 갑자기 정장을 입어야 하는 일이 생기면 급히 새로 구입해야 할 것이 걱정되어 버리지 못하는 마음도 같은 맥락이다.


모든 것이 뒤섞인 ‘혹시 몰라’라는 마음은 단순한 물건 이상으로 우리 내면의 불안과 맞닿아 있다. 그러한 마음을 이해하고 마주하는 것이 진짜 정리의 시작이 아닐까 한다.

깨달음은 얻었지만 행동의 시작은 내일의 나에게 미루어 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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