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놀이터에서 초록색 모니터 속으로

디지털 트라이브 0.5세대가 기억하는 첫 번째 빅뱅

by 중년의 모험가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 하면 골목골목 친구들과 뛰어놀거나 근처 놀이터에서 동네 친구들과 노는 것이 전부였던 국민학교 시절, 처음 아버지가 PC를 집으로 사 오셨다. 비록 집안에 있는 고가의 가전제품 중 하나였기에 안방에 고이 모셔 두어야 했지만, 그 당시 XT 컴퓨터는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한 나의 소중한 장난감이 되어 주었다.


친구들이 와서 만지다 고장을 낼까 봐, 혹은 도둑이 들지 몰라 최대한 비밀로 해야 했던 나의 보물. 먼지가 들어가면 고장 나는 민감한 기기라며 할머님이 바느질로 전용 덮개까지 만들어 씌워 주셨던 기억이 선하다. 하드디스크가 아닌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사용하던 시절, 검은색 디스크들을 앨범에 하나씩 소중히 담아 두곤 했다. MS-DOS의 구동 화면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명히 떠오르는 나의 첫 디지털 기억이다.


학원에서 배운 'GW-BASIC'은 기계와 친해지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초록색 글씨로 문자를 표현하고, 선과 면을 그려 도널드 덕의 얼굴을 완성했을 때의 성취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터치 몇 번과 프롬프트만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AI 시대가 왔지만, 한 글자씩 타이핑하며 만든 작품에 가졌던 애착은 지금의 결과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후 나의 놀이터는 골목이라는 물리적 환경에서 모니터 속 가상 세계로 확장되었다. '심시티' 속 도시의 조물주가 되어 경영하는 즐거움은 컴퓨터가 단순한 놀잇감 이상의 공간이 되는 전환점이었다. 학교 컴퓨터실에 들어가기 위해 서클에 가입하고, PC통신의 모뎀 접속음을 들으며 지방 소도시를 넘어 세상과 연결되는 창문을 발견했다.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을 쥐고 클라우드를 신뢰하는 나의 아이와 달리, 나는 여전히 하드디스크에 자료가 저장되어야 안심이 되는 '디지털 트라이브 0.5세대'다. 아무리 스마트폰의 성능이 좋아져도 나에게 컴퓨터는 여전히 단순한 기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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